문학현장
훌륭한 번역으로 재현된 세계문학

- 마티아스 아우구스틴·박경희 독역 『Der Wal (고래)』(천명관 作)

  • 문학현장
  • 2023년 겨울호 (통권 90호)
훌륭한 번역으로 재현된 세계문학

- 마티아스 아우구스틴·박경희 독역 『Der Wal (고래)』(천명관 作)

제31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리뷰 

 

2004년 출간되어 2023년 국제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르며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천명관의 『고래』는 기념비적 작품이다. 환상적인 서사시, 숨 막히는 동화, 카니발적 피카레스크 소설, 한국 근대화의 문화사, 여성주의적 고발서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독특한 흡입력은 격동적이며 모험적인 이야기, 기교하게 얽힌 줄거리, 독창적이고 대담한 문체, 힘 있는, 때로는 잔인한 유머, 그리고 무엇보다도 괴상하고 비범한 캐릭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역사적 관점으로 봤을 때 전근대, 근대, 그리고 탈근대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는, 소설의 주인공들 모두는 성격이 강한 세 명의 여성들이다. 평대라는 마을에서 국밥집을 운영하면서 재산을 모은 뒤 ‘세상에 대한 복수’를 이루기 위해 이 돈을 숨겨 놓은, 이름이 없는 ‘보기 드문 박색의 노파’, 능력 있는 ‘팜므파탈’로서 남성 지인들을 이용해 출세한 뒤 노파의 국밥집에 들어가 숨긴 돈을 발견하고 복수의 저주를 받은 ‘금복’, 그리고 금복의 딸이지만 엄마에게서 살가운 애정 한번 받아보지 못한, 신체적으로는 초자연적으로 강하면서도 굉장히 예민한 벙어리 ‘춘희’. 수많은 다른 기괴한 인물들에 둘러싸인 이 세 명의 인생을 중심으로 하며 인간의 욕망·희망·실망, 인간의 자유와 자아실현, 인간의 위대함과 비참함 등과 같은 실존적인 문제들을 다루는 이 소설은 기존 서사 관행의 경계를 철저히 탐구하는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제 문학 평론가들이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며 이 소설에서 마술적 사실주의의 강렬한 표현, 동양 신화의 숭고함, 무협적인 역동성, 판소리의 즉흥적인 서사 흐름, 라블레(Rabelais)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 등과 같은 다양한 문학적 영향을 발견하였다.

독일에서 출간 이후 대중 매체들도 이 책에 대한 반응이 뜨거웠다. 『고래』는 “위대한 문학”(서남방송 SWR 2), “서사적 걸작”(문화포털 Kulturaustausch), “대단하다”(문화웹사이트 Kultur-Port)는 찬사를 받았고, 천명관 작자는 “타고난 이야기꾼”(프랑크푸르트 신문 FAZ)이라고 불렸다.

잘 알려진 것처럼 한국 문학에 대한 해외의 반응은 번역의 퀄리티에 따라 흥망성쇠가 갈리는데, 이 소설이 박경희와 마티아스 아우구스틴(Matthias Augustin)이라는 훌륭한 번역가를 만난 것, 그리고 두 분이 이 거대한 프로젝트를 막대한 진정성과 책임감으로 품어 주신 것은 독자에게 큰 행운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작품의 번역이 얼마나 커다란 도전인지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500쪽이 넘는 이 책의 방대한 분량만이 많은 번역가들을 망설이게 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뿐만 아니라 작품의 미학적 매력을 살릴 수 있도록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이 유난히 까다롭고 다종다양하다. 기교적으로 중첩된 문장들, 문화 특수적인 표현들, 사회적·정치적 암시들, 종교적인 상징들, 밀도 높은 분위기, 등장인물의 다양한 목소리들, 서사의 템포·역동성·리듬 등과 같은 요인들로 인해 번역가의 업무가 굉장히 복잡해짐에도 불구하고 번역가 두 분은 균형 잡힌, 문학적 설득력이 있는 솔루션을 찾아냈다.

『고래』의 독일어 번역본에 여전히 존재하는 단어 선택 오류 및 구문 오류 중 상당 부분은 쉽게 수정할 수 있었을 만큼, 좀 더 꼼꼼하게 편집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남아있긴 하지만 두 번역가들이 보여준 사명감과 끈기, 풍부한 표현능력, 우수한 문체감각은 인상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특히 이 탁월한 번역작업 덕분에 천명관의 『고래』는 많은 독일 독자들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얀 헨릭 디륵스
번역가, 가천대학교 유럽어문학과 교수, 1975년생
역서 『Vaseline-Buddha(바셀린 붓다)』, 『Winter im Spiegelland(거울나라의 겨울)』, 『Love in the Big City(대도시의 사랑법)』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