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현장
발견의 힘

-김기택 시집 『낫이라는 칼』

  • 문학현장
  • 2023년 겨울호 (통권 90호)
발견의 힘

-김기택 시집 『낫이라는 칼』

제31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리뷰

 

김기택 시인의 여덟 번째 시집 『낫이라는 칼』은 지금까지 견지해 온 시인의 시 세계를 더 미시적으로 확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첫 시집 『태아의 잠』에서부터 시인은 주체에서 세계와 사물로 중심을 옮겨간 시를 써왔다. 주체 중심주의에서 벗어난 그의 행보는 주관과 감정으로 가득 찬 자신을 내려놓는 여정이었으며, 이것은 사물을 우선 보이게 하는 사물시를 탄생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한마디로 인간의 정서와 판단에 갇히지 않는 사물 세계를 전면화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시인의 이러한 태도는 사물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적용되었다. 『사무원』이나 인간이 등장하는 다른 시편들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 역시 세계를 복속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화되고 관찰되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즉 그의 시에서 인간은 주체의 입장에서 세계를 포섭하지 않는다. 다른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사물과 평등하게, 세계의 한 부분에 해당될 뿐이다.

시인의 시선이 이렇듯, 사물이든 인간이든 묘사되는 대상과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을 때 긴장은 팽팽하게 고조되고 대상은 명료하게 드러난다. 사물은 주체의 정념이나 관념으로 찌그러지지 않는다. 그동안 여하한 경우에서도 용이하지 않았던, 사물이 자신을 실현하는 듯 보이기까지 한다. 다시 말하면 김기택 시인의 시에서 사물은 자신의 특성을 직접적으로, 매우 구체적이고 충실하게, 탄력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비로소 사물이 살아있는 듯 나타나게 된다. 그의 시는 이렇게 움직이고 활성화된 사물에서 나온다. 사물이 시를 이끌고 나아간다. 시인의 정념이나 생각이 사물을 가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낫이라는 칼』은 이러한 시인의 시 세계가 더 미세하게, 더 넓게, 더 아이러니하게 발전한 모습을 보여준다. 시집 어느 곳을 펼쳐도 우리는 더 세분화되고 작은 것, 보잘것없어서 이른바 가치가 없는 것, 일상적이어서 주목하지 못하고 놓쳐버리는 것, 너무 당연해서 보이지 않는 것 등을 전면적으로 만나게 된다. 먼지, 벌레, 곰팡이밖에 들어갈 수 없는 구석이라든지, 꼬리가 있는지도 모르고 흔드는 강아지, 눈이 되어 땅을 더듬는 눈먼 사람의 지팡이, 대형트럭이 돌진하는 팔차선 도로를 팔자걸음으로 느릿느릿 걸어가는 할머니, 몸통에서 달아나는 머리를 잡아주는 목, 아무도 옆에 오지 앉아서 저절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실천되는 노숙자, 한 올 뽑을 때마다 더 많이 돋아나는 흰 머리카락들 말이다. 페이지를 열 때마다 사물들이, 사물화된 존재들이, 현상들이 쏟아져나온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결국 무엇인가, 무엇이고자 하는가, 하는 목적론적 존재론은 그의 시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그들은 그들일 뿐이다. 그들을 넘어서지 않는다. 강아지는 계속 꼬리를 흔들고, 머리는 목에 붙어 있고, 흰 머리카락은 점점 더 많아질 뿐이다. 사물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은 주어지지 않는다. 즉 사물들이 이루고 있는 세계는 해석되지 않는다. 아니, 시인은 해석하지 않는다. 해석되지 않는 세계를 해석하려 하지 않는다. 시인은 묘사할 뿐이다. 시인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로지 묘사이며, 묘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발견이다.

김기택 시인의 힘은 오로지 이 발견에서 나온다. 시인은 마치 지금 바로 발견한 듯이 생생하게 사물을 묘사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미 보았거나 알고 있던 것들조차 비로소 존재하게 된 듯 나타난다. 어떠한 관념이나 편견에도 속박받지 않은 채로, 만약 속박되어 있다면 그 속박까지도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는 발견이 일어나는 그의 시의 현장에 들어서게 되고, 그 발견에 동행하게 된다. 얼마나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계속 두리번거리며 맞닥뜨리게 된다. 발견의 세계는 넓고 무한하다. 심지어 시인이 「사무원 기택씨의 하루」에서 주름, 거북목, 버스, 재채기, 휴대폰, 팔다리 등으로 아슬아슬하게 조립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듯이, 우리 스스로를 발견하는 일조차 피할 수 없다.

이수명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1965년생
시집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 『붉은 담장의 커브』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 『마치』 『물류창고』 『도시가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