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현장
제31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선정

  • 문학현장
  • 2023년 겨울호 (통권 90호)
제31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선정

한국문학의 성취를 확인하는 대산문학상의 서른한 번째 수상작들이 모두 결정되었다. 이번 수상작 선정 과정은 더욱 다양하고 풍성해진 한국문학의 얼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작업이었다.

수상작으로는 시 부문 김기택 作 『낫이라는 칼』, 소설 부문 현기영 作 『제주도우다』, 희곡 부문 이양구 作 「당선자 없음」, 번역 부문 마티아스 아우구스틴‧박경희 독역(獨譯) 『Der Wal(고래)』(천명관 作)가 선정되었다. 부문 별 5천만 원씩 총 2억 원의 상금이 수상자에게 수여되며 양화선 조각가의 청동 조각 작품인 ‘소나무’가 상패로 수여된다. 시, 소설, 희곡 부문 수상작은 재단의 번역지원 사업을 통해 여러 언어로 번역하여 해외에 출판, 소개될 예정이다.

 

▲시 부문 『낫이라는 칼』(김기택 作)은 오늘의 현실에 맞서 보다 나은 삶을 지향하는 지적 생명의 노력을 진보시키고 있으며 미적 완성의 최고도를 향해 솟아오른 점 ▲소설 부문 『제주도우다』(현기영 作)는 제주의 신화와 설화의 소용돌이를 현재적으로 되살리고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해방공간에 이르기까지 제주 삶의 실상과 역사를 종횡으로 넘나들면서 4.3의 비극을 넓고 깊게 해부한 점 ▲희곡 부문 「당선자 없음」(이양구 作)은 사회성과 작품성의 조화에서 빼어난 균형감을 찾고 있으며, 현실 참여적 희곡문학의 빼어난 모범을 보여준 점 ▲번역 부문 독역 『Der Wal(고래)』(마티아스 아우구스틴·박경희 共譯)은 방대한 소설의 양과 긴 길이의 문장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흐트러짐 없는 방식으로 번역해 내었으며, 충실성과 가독성을 두루 갖춘 번역으로 이야기의 힘을 살려낸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수상자들은 아래와 같이 수상소감을 전했다.

 

“낫이 칼이 아니고 연장인 이유는 날이 낫을 쥔 사람을 향해 구부러져 있기 때문입니다. 시를 쓸 때, 가끔 나를 향한 이 칼날이 느껴집니다. 이 느낌이 정신을 번쩍 들게 합니다. 시가 무엇인지, 무엇이어야 하는지, 다시 묻게 합니다. 시를 계속 써야 하는지 이런 시를 써서 무엇을 할 건지 묻게 합니다.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냉정하게 바라보고 제 시의 길을 뼈아프게 모색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 수상을, 심기일전하여 더 좋은 시를 쓰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기가 두려워집니다. 수상 소식을 들으면서 느낀 부끄러움이 새로운 시를 향한 용기로 바뀌기를 기대합니다.” - 김기택

 

“되돌아보면, 고향 제주도에 대한 나의 문학적 집착은 가히 병적일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한 이후 지금까지 60여 년간 내내 서울과 그 근처에서 생활해 왔으면서도, 정신적으로는 여태 고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의 글에 호감을 갖고 있는 독자들 중에도 이제는 4.3이 주는 완강한 경직성에서 벗어나 인생사의 다정다감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바라는 이들도 적지 않다는 걸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도 나중에는 4.3에서 벗어나 따뜻한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4.3의 슬픔에 대해서 그만큼 오래 얘기해 왔으니, 이제는 거기에서 벗어나도 되지 않나 싶었죠.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4.3은 어느덧 나의 문학적 정체성으로 굳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 제주도, 한때 세상에서 가장 불행했던 그 나라에서 나는 차마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노년에 세 권짜리 긴 소설 『제주도우다』를 쓰게 된 연유입니다.” - 현기영

 

“한 사람의 마음에서 사회와 국가에 이르기까지 균형을 이루며 살아가려면 크고 작은 무게추들이 필요합니다. 이를테면 일상에서 적절한 한 마디나 침묵에서부터, 사회적 지위에 따른 힘, 제헌헌법에 있었던 이익균점권이나 노동3권 같은 것들이 그러한 것입니다. 균형을 잃은 마음, 균형을 잃은 사회와 국가에 대해 마음속으로 오래 생각하다가 “나의 무게를 스스로 알지 못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어요. 나 자신을 어느 위치에 올려놓아야 하는지 몰랐어요”라는, 「당선자 없음」의 무게를 잡아주는 대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대본을 쓰는 사람에게 작가와 대본을 해석하려고 계속 노력하는 배우들, 연출, 스태프와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은 커다란 행운입니다. 「당선자 없음」은 특별한 행운을 얻었습니다.” - 이양구

 

“2022년 봄 『고래』의 번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을 때 저는 무엇이 저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출판사가 짧은 본보기 번역만을 검토한 후, 놀랍게도 50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을 출간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같은 해에 말입니다. 그 순간부터 저는 호기심 가득한 독자의 눈으로 이 환상적인 서사를 읽어 나가며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넘어갈 때마다 열광했습니다. 그토록 재밌고 즐겁게 작업을 했는데, 이렇게 큰 상까지 받게 되니 너무 감사하면서도 조금은 부끄러운 마음마저 듭니다.” - 마티아스 아우구스틴

 

(왼쪽부터) 김기택,현기영,이양구수상자. 마티아스 아우구스틴·박경희 번역가는 독일 거주 중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소설 『고래』는 늦은 저녁 버스정류장에서 작가에게 길을 묻던 유달리 덩치 큰 소녀의 이미지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소녀는 작가가 건네는 버스비를 마다하고 묵묵히 자신이 가야 갈 방향으로 걸어가더랍니다. 훗날 주인공 ‘춘희’의 모델이 된 그 소녀를 걱정하며 집으로 돌아가던 작가의 마음, 어려운 시절 작가에게 소설 쓰기를 권했다는 동생분의 마음을 자주 생각했습니다. 어둠 속의 빛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하고요. 문학번역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오늘까지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준 대산문화재단에도 깊은 감사를 드리며 그 빛을 잊지 않는 번역가가 되고 싶습니다.” - 박경희

 

제31회 대산문학상 심사 대상작은 2022년 8월부터 2023년 7월(평론은 지난 2년, 번역은 지난 4년)까지 단행본으로 출판된 모든 문학작품이었다. 지난 한 해 한국문학의 작황을 확인해야 하는 대산문학상은 많은 작품 중에서 부문별로 단 1편만을 수상작으로 선정(공동수상이나 가작 없음)해야 하기에 심사위원들은 두 차례 이상 만나 장시간에 걸쳐 토론을 펼쳐야 했다. 심사위원들은 작가들의 취향과 개성이 다양하게 발휘되어 더욱 풍성해진 한국문학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밝히며 대산문학상의 취지에 맞는 작품을 선정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고 소회를 밝혔다.

 

예심은 김언 안현미 홍용희(이상 시), 강동호 김영찬 손홍규 정한아(이상 소설) 등 소장 및 중견문인, 평론가 7명이 6월부터 약 두 달 동안 진행하였다.

본심은 고형렬 구모룡 김승희 이수명 정명교(이상 시), 김이정 우찬제 윤대녕 임철우 한기욱(이상 소설), 고연옥 유근혜 이상우 장우재 한태숙(이상 희곡), 문광훈 안인경 얀 디륵스 지몬 바겐쉬츠(이상 독일어 번역) 등 중진 및 원로문인, 평론가, 번역가들이 8월 말부터 두 달 동안 장르별로 심사를 진행하여 수상작을 결정하였다.

시상식은 11월 23일(목) 오후 6시 30분 한국프레스센터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열린다.

유혜리
대산문화재단 문화사업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