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발굴기
아스팔트 밑에 자리한 조선의 역사 : 서울 발굴 이야기

  • 문화유산발굴기
  • 2023년 겨울호 (통권 90호)
아스팔트 밑에 자리한 조선의 역사 : 서울 발굴 이야기

사진 1. 서울 종로 청진동 일대 발굴조사 모습(사진제공 (재)한울문화재연구원)    

 

발굴조사라면 대부분 깊은 산속에서 오래된 절터를 찾거나, 경주나 부여 같은 옛 도읍에서 왕릉을 조사하는 광경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인파와 고층 빌딩이 즐비한 광화문과 종로 같은 서울 한복판에서도 거의 십여 년 동안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천년대 이후 서울시는 구도심의 난개발을 막고 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서울 사대문 안의 경우 건물 신축 이전에 반드시 문화유산 발굴조사를 실시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리가 매일 지나다니는 포장도로 밑에서 조선 초기 이후 근 600여 년의 역사가 만든 흔적을 확인했다(사진 1).

서울은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다. 특히 한양도성으로 둘러싸인 종로구와 중구 일대는 조선 시대에 그야말로 ‘서울’이었고, 지금도 궁궐과 종묘 등 여러 문화유산이 남아있다.

 

사진 2. 서울 종로 청진동에서 발굴된 박석길 모습(사진제공 (재)한울문화재연구원)    

 

역사 도시 서울은 현대화된 편의의 공간이기도 하다. 최근 종로대로 주변은 특유의 낮고 허름한 건물들이 사라지고 지하에 각종 편의 시설을 갖춘 현대식 고층 건물이 들어차며 겉모습이 크게 바뀌었다. 많은 사무실이나 해장국집 같은 식당 때문에 종로 일대를 번잡한 서민의 공간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조선 시대 광화문 앞길과 종로 일대는 지금보다 훨씬 중요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광화문 앞길 좌우로는 여러 관청이 즐비하게 들어섰었다. 뒤쪽에는 각 관청에 속한 크고 작은 부속시설도 빼곡하게 자리했을 것이다. 전국에서 생산된 다양한 물자들 역시 서울 상인의 거점인 종로 일대에 모여들어 도성인 한양을 비롯하여 전국으로 유통되었다. 광화문 앞길 남측으로 연결되는 종로대로 변에는 시전행랑(市廛行廊)이 들어섰다. 시전의 서울 상인은 궁궐과 관청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고 명나라와 무역에도 참여하는 등 점차 한양에서 벌어지는 유통과 경제 활동의 주역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지역의 특성 때문에 종로에서 발굴되는 유물들은 조선 시대 물질문화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종로의 유적은 서울의 한복판에 자리하는 만큼 유물의 품질이 좋고 출토량이 국내 다른 유적에 비해 엄청나다. 특히 경복궁과 창덕궁의 사이에 해당하는 청진동과 공평동은 조선 시대 왕족을 비롯하여 높은 벼슬을 하던 사대부 관리와 돈 많은 서울 상인이 함께 모여 살던 곳이었다.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위상은 청진동을 동서로 가로지르던 특별한 길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그랑서울 빌딩’으로 바뀐 자리에는 얇고 넓은 돌로 포장된 ‘박석길’이 발굴되어 이목을 끌었다(사진 2). 조선 시대 한양의 길은 대부분 비포장의 흙길이었다. 주로 궁궐 혹은 왕릉에서나 볼 수 있는 박석으로 포장된 길이 있었다는 것은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서울의 다른 곳에 비해 분명 높은 신분이었다는 것을 이야기해 준다. 또한 이 지역에서는 질 좋은 도자기도 많이 출토되었다. 특히 원나라와 명나라에서 수입된 값비싼 청화백자들이 다량으로 출토된 곳 또한 청진동과 공평동이다(사진 3).

 

사진 3. 서울 종로 공평동 출토 중국 자기들(사진제공 (재)한울문화재연구원)    

사진 4. 백자편, 현재높이 4.2㎝, 서울 종로 공평동 출토, 공평도시유적전시관   

 

조선 전기 청화백자는 아무나 쓸 수 없는 물건이었다. 청화백자는 새하얀 백자에 파란색 문양이 장식된 특별한 그릇으로, 중동 지역의 코발트 안료가 있어야만 만들 수 있었다. 조선 시대에는 코발트 안료를 주로 중국과의 무역을 통해서 얻을 수 있었고, 가격 또한 매우 비쌌다. 이런 이유로 조선 시대 청화백자는 경기도 광주에 자리했던 사옹원(司饔院)의 분원(分院) 관요(官窯)에서만 제작되었고, 조선 전기에는 왕실을 중심으로 사대부 관리만이 청화백자를 술그릇에 한정하여 사용할 수 있었다. 실제로 조선 전기의 청화백자는 지방의 유적에서 거의 확인되지 않고 있다. 오직 서울 사대문 안의 일부 유적, 특히 청진동과 공평동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출토하고 있다. 이러한 발굴 성과 역시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조선 왕실과 밀접한 관계였음을 시사해 준다.

종친과 외척 등 쟁쟁한 집안의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었던 만큼 종로 일대에서는 흥미로운 유물들이 다양하게 발굴되었다. 공평동에서는 ‘효šœ’이라는 한글이 새겨진 <백자편>이 출토됐다(사진 4). 효순공주(孝順公主, 1522~1538)는 중종(中宗, 재위 1506~1544)과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가 낳은 큰딸이다. 효순공주는 능성 구씨 집안의 구사안(具思顔, 1523~1562)에게 시집을 갔고, 공평동 일대는 능성 구씨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능성 구씨들은 효순공주의 저택을 중심으로 가문의 크고 작은 잔치와 모임을 벌였고 그때마다 음식과 여러 그릇들이 오갔던 모양이다. 공주의 저택에서 사용했던 식기는 형태가 단정하고 색상이 순백색에 가까운 우수한 품질의 백자였다. 당시로는 최고 수준의 그릇이었기 때문에 다른 집안의 그릇과 뒤섞이는 것을 막고자 그릇에 주인의 이름을 새겼을 것이다.

인근 청진동에서는 큼지막한 백자항아리 세 점이 온전한 모습으로 함께 출토되기도 했다(사진 5). 이 항아리들은 현재 교보빌딩 뒤편 KT 사옥이 들어선 자리에서 발굴되었다. 항아리들은 출토지가 명확하며, 이러한 유물이 희소하고 예술적으로 우수하다는 것을 근거로 <서울 청진동 출토 백자항아리>라는 이름의 보물로 지정되었다. 백자항아리들은 대략 16세기에 관요에서 만들어졌다가 17세기 무렵에 어떤 건물의 기단 앞에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 시내에서 조선 시대 유적을 발굴하다 보면 가끔 놋그릇 제기(祭器)나 구리거울 같은 유물을 여러 개 모아 땅속에 묻어 둔 것을 마주할 때가 있다. 외적의 침입 등 난리가 일어나면 귀하지만 무거워서 가지고 피난하기 어려운 것들은 마당에 묻어 두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만약 청진동에서 출토된 백자항아리들도 그런 이유에서 묻어 둔 것이라면, <서울 청진동 출토 백자항아리>는 우리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 사람들에게도 보물이었던 모양이다.

 

사진 5. 서울 청진동 출토 백자항아리(보물), 높이 35.5㎝(좌), 서울역사박물관     

 

사진 6. 공평도시유적전시관 내부 모습     

 

조선 시대 한양의 모습을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는 유적 가운데는 발굴조사 이후 박물관으로 탈바꿈한 사례도 있다. 종로타워 뒤편 센트로폴리스 건물 지하에 자리하는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이 대표적이다.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은 서울시가 추진하는 도심재개발사업과 문화유산 보존이라는 서로 상충되는 목적을 조화롭게 확보한 사례라 할 수 있다.

공평동 유적은 2013년에 발굴을 시작하여 2015년에 조사를 마쳤다. 조사과정에서 조선 초기부터 근대기에 걸쳐 형성된 수많은 집터와 유물들이 지표로부터 약 4m 깊이에 걸쳐 확인되었다(사진 6). 이에 서울시와 문화재청 그리고 사업시행자는 공평동 유적에서 확인된 조선 전기 건물지들을 발굴조사 이후 원래 위치에 전면적으로 보존하고 유적전시관을 조성하는 데에 합의했다. 서울시는 발굴된 문화유산의 보존면적에 따라 건물 용적률을 높여주었다. 건물을 더 높게 지을 수 있게 된 사업시행자는 지하 1층을 유적전시관으로 만들어 서울시가 관리하도록 했다. 그 결과 공평동 유적은 2018년 9월에 ‘공평도시유적전시관’으로 재탄생했다.

 

지금도 서울 시내에서는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난 다양한 유적과 유물은 조선 시대 한양의 생활상과 사회상을 밝혀 줄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오늘의 서울에 사는 우리에게 과거 서울의 모습과 역사를 전해 줄 수 있는 소중한 자원들이다.

박정민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부교수, 1977년생
저서 『동아시아의 도자문화 백자』(공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