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의 한국 소설에서 만나는 (아이돌) 팬덤
- 최근의 한국 소설에서 만나는 (아이돌) 팬덤
마지막 콘서트를 앞둔 가상의 여성 아이돌 그룹 ‘제로캐럿’을 둘러싼 이야기와 그들의 팬이자 팬픽 작가인 ‘파인캐럿’이 쓴 일곱 편의 팬픽이 교차하는 형식의 경장편소설 『라스트 러브』(2019, 창비)를 출간했을 때, 나는 ‘왜 아이돌과 팬덤의 이야기로 소설을 썼는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다. 작가들에게 자주 주어지는 ‘왜 그 작품을 썼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결국 ‘쓰고 싶어서’라는 단순한 이유로 귀결되기 마련이고, 『라스트 러브』 역시 그랬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 쉬운 답 앞에서 망설일 수밖에 없었는데, 뭔가 다른 말-이왕이면 의미심장한 말-을 해야만 할 것 같은 부담을 느껴서였다.
언론 인터뷰는 물론 독자와의 만남 자리에까지 이어진 비슷한 질문들에서는 흔히 서브컬처(하위 문화 혹은 부차적 문화)로 여겨지는 팬덤 문화를 ‘문학의 장’으로 끌어들인 이유를 궁금해 하는 구체적 호기심이 드러났다. 아이돌과 팬덤이 등장하는 소설을 쓰면서 어떤 문학적인 효과 혹은 성과를 기대했는지 직접적으로 묻는 경우도 있었다.
덕분에 나는 담백한 대답 대신 구구절절한 사족의 말을 늘어놓게 되고 말았다. 독자를 향한 첫 글쓰기 경험이 팬픽이었다는 것, 지금껏 좋아해 온 아이돌 그룹의 역사이자 동시에 내가 속한 팬덤의 역사라 할 수 있는 시간들, 여성 아이돌의 여성 팬으로서 대중문화 안에서 소비되는 방식을 인식하며 원죄처럼 지고 가는 죄책감까지 줄줄 털어놓는 부끄러운 일들이 종종 일어났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소설을 쓸 때보다 책을 출간한 뒤에 더욱 자주 소설 속 인물이 누군가의 팬이며 그와 같은 처지인 팬덤에 속해 있다는 것이 소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고민했고, 다른 작가들의 작품도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다.
이희주의 장편소설 『환상통』(2016, 문학동네)은 남성 아이돌 그룹 멤버 ‘M’을 사랑하는 20대 여성 ‘m’과 ‘만옥’의 이야기다. 현실에서 ‘m’과 ‘만옥’ 같이 남성 아이돌을 열렬히 사랑하는 어린 여성 팬들은 ‘빠순이’라는 비하적인 단어로 조롱당하는 일이 많은데, 『환상통』은 바로 그 ‘빠순이’의 목소리로 자신의 사랑을 기록한다. 이 소설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가끔 팬들을 볼 때 이런 생각을 해요. 각자 다른 사람들이 뭉쳐 있는 건데, 왜 같은 사람처럼 보일까.”(176쪽) 나는 이 문장에서 소설에 등장하는 팬덤을 바라보는 주요한 힌트를 얻었다.
팬덤은 같은 대상을 향한 사랑을 매개로 형성된 특수한 공동체다. 팬덤 안에서 팬들은 하나뿐인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라 공통의 과업을 위해 협업하는 동료에 가깝다. 그 공통성은 때로 팬덤을 이루는 팬 개개인의 개별성을 압도하고 외부자가 섣불리 그들을 동일시하는 우려를 범
하게 한다. 하지만 팬덤은 팬들을 잘 빚어 하나로 만든 반죽이 아니다. 언제든 흩어질 수 있는 저마다 다르게 생긴 모래 알갱이들이 사랑이란 이름으로 잠시 뭉쳐있는 형상에 가깝다. 때문에 그들에 대한 섣부른 동일시는 필연적으로 배반당한다. 다른 모든 사람의 무리가 그러하듯이, 거대한 특수성을 공유하더라도 팬덤 안의 팬 개개인은 저마다 고유한 사랑의 서사를 가진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이 소설을 쓰는 입장에서 매력을 느끼는 부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환상통』에 대한 강지희의 추천사 “짝사랑을 향한 처절하리만큼 절박한 이 고백의 발화들이 연예인을 향한 특정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 보편성의 마력에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를 이렇게 다시 쓰고 싶다. 『환상통』의 처절하리만큼 절박한 고백의 발화는 사랑이라는 보편성이 아니라 스타를 향한 팬의 사랑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더 큰 마력을 가진다. 나는 이 문장이 진실이라는 것을 같은 추천의 말을 전할 수 있는 다음의 작품들을 통해서도 증명할 수 있다.
엄성용의 장편소설 『혐오스런 선데이 클럽』(2023, 안전가옥)에는 톱스타 ‘이선오’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얽힌 진실을 파고드는 팬클럽 ‘혐오스런 선데이 클럽’이 등장한다. 자신들의 스타가 자살했을 리 없다고 믿는 이들은 그 믿음의 공동체로서 힘을 모아 사건을 추리해 나간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여러 난관이 이들을 가로막는데, 그 난관을 극복하는 모습이 스타와 팬덤 사이의 사랑이 일대다수의 사랑이자 동시에 일대일의 사랑이라는 특수성을 잘 보여준다. 이들은 저마다 과거의 상처를 가진 인물들로, ‘이선오’를 사랑함으로써 스스로가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임을 깨닫고 변화한다. 즉 이들이 품고 있는 사랑은 ‘이선오’를 향한 사랑일 뿐만 아니라 ‘이선오’라는 대상을 거쳐 다시 돌려받은 자신의 사랑이다. 이 돌려받은 사랑은 필연적으로 저마다 고유할 수밖에 없다. 그 고유한 사랑들이 모여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가는 『혐오스런 선데이 클럽』의 서사 구조는 스릴러 장르와 매끄럽게 결합한다.
아밀의 장편소설 『너라는 이름의 숲』(2023, 허블)은 기후 위기로 디스토피아가 된 근미래의 지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소녀 아이돌 ‘이채’와 그를 사랑한 소녀 팬 ‘숲’의 이야기다.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숲’에게는 ‘이채’의 음악이 유일한 위안이다. 작중 세계에서 아이돌은 팬과 가상현실을 통해 현실보다 더 생생한 감각으로 소통하는데, ‘숲’은 ‘가상현실 저항증’ 때문에 팬덤의 다른 팬들과 달리 음악을 통해서만 ‘이채’의 마음을 상상하고 감동할 수밖에 없다. 이런 ‘숲’의 상황은 그의 사랑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고, 그 견고함은 힘든 현실을 버텨나가는 방패가 되어준다. 작가는 이 사랑을 ‘숲’에게만 머물게 하지 않고 ‘이채’에게 닿게 함으로써 각자의 사랑으로 서로를 구하는 스타와 팬의 특수한 사랑의 서사를 그려낸다. 대중문화 산업의 상품으로 상품성을 평가받으며 시선과 검열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던 ‘이채’에게 ‘숲’과 같이 자신의 진심이 담긴 음악을 알아주는 팬이 있다는 사실은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용기가 되고, 두 소녀는 서로를 통해 성장한다. 누군가의 사랑이 다른 이의 삶을 변화시키는 이야기에는 감동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한편, 팬덤의 사랑 역시 여타의 사랑과 같이 여러 얼굴이 있다. 희망과 위안, 용기의 힘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파괴적이고 유해하며 쾌락적인 면모 역시 존재한다. 서귤의 장편소설 『디 아이돌 : 누가 당신의 소년을 죽였을까』(2022, 위즈덤하우스)는 가상의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디 아이돌> 촬영 중 오디션에 참여한 한 연습생이 살해당한 사건으로부터 시작한다. 같은 자리에 있던 연습생 10명이 용의선상에 오르고, 시청자들의 투표로 유력한 용의자를 선출하는 프로그램 <디 아이돌 특별 편 : 소년 단죄>가 제작된다. 이 작품은 프로그램과 관련된 여러 인물들을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연습생들의 팬덤이 등장하는 부분에서 독자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표출되는 욕망의 민낯을 마주하게 된다. 이희주의 장편소설 『성소년』(2021, 문학동네)은 보다 더 깊은 욕망의 기저를 드러낸다. 장맛비로 고립된 산장에서 기억을 잃은 채 눈을 뜬 소년은 자신을 극진히 돌봐주는 네 명의 여자에게서 노골적인 욕망을 느끼며 두려워한다. 독자들은 소년이 곧 마주하게 될 파국의 진실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게 되는데, 인기 아이돌 ‘요셉’의 팬인 네 명의 여자가 그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납치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소년』은 여성-팬과 남성-스타 사이에 존재하는 정념의 극단을 펼쳐내는 배경으로 90년대 말, 한 세기의 끝을 제시해 생생한 현실감을 획득하며 독자를 몰입시킨다.
그런가 하면 팬덤의 사랑은 스타의 자리를 비워둔 곳에서도 그 힘을 발휘한다. 이혜오의 장편소설 『우리가 별을 볼 때』(2022, 책나물)는 세상 어디에도 자기 자리는 없다는 생각으로 외로워하는 청소년 ‘나(주다인)’가 주인공이다. ‘나’는 남성 아이돌 그룹 ‘유니버스’의 팬클럽 ‘안드로메다’ 사이에서 유명한 팬픽 작가 ‘J여신’의 팬픽을 보며 위안을 얻는다. 아이돌 멤버들을 동성 연인 사이로 그리는 팬픽의 세계에서는 오직 사랑만이 당위이기 때문이다. 그 사실에서 안도감을 느끼는 자신을 인식하면서 ‘나’는 성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이 소설은 애틋한 성장소설로 특히 사랑이 어떤 환경에서 발아하는가를 들여다보는 작가의 세심한 시선이 돋보인다.
나는 『라스트 러브』 이후 또 한 번 팬덤이 등장하는 소설을 썼다. 앤솔로지 『이 사랑은 처음이라서』(2020, 다산책방)에 수록한 동명의 단편소설이다. 초등학생 ‘주영’은 전학 첫날 자신에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주는 친구 ‘현정’과 친해지고 싶어 여성 아이돌 그룹 ‘밀크드
림’의 팬인 척하다가 그만 정말로 그 그룹의 팬이 된다. 하지만 자신보다 다른 팬들과 친하게 지내는 친구에게 질투를 느끼고 다툰 사이 오해의 매듭을 풀지 못한 채 십 수 년의 시간이 흐른다. 학원 강사가 된 ‘주영’이 자신의 제자가 레트로 열풍을 타고 다시 화제에 오른 ‘밀크드림’의 팬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팬들이 모인 자리에서 ‘현정’과 재회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소설을 쓰면서 나는 왜 자꾸 아이돌과 팬덤의 이야기를 쓰느냐는 질문을 받는 나를 상상해 보았다. 이번에는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팬과 팬의 사랑을 소설로 쓰고 싶었다고. 그리고 앞으로도 스타를 사랑하는 팬, 그들이 모인 팬덤에 대한 이야기는 내 소설에 또 등장할 것 같다. 스타가 있는 세상이라는 테이블 위에 무수한 조각들을 흩어놓고 사랑이라는 퍼즐을 따로 또 같이 맞추는 사람들의 얼굴을 오래 들여다보고 싶다. 무엇보다 팬덤이 나오는 소설, 읽는 것도 쓰는 것도 참 재미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