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데뷔작
역사 속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들

- 『빨치산의 딸』

  • 나의 데뷔작
  • 2023년 겨울호 (통권 90호)
역사 속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들

- 『빨치산의 딸』

『빨치산의 딸』을 쓴다고 고백했을 때 나의 존경하는 스승이신 신상웅 선생께선 깜짝 놀랐다. 선생도 그때까지 내가 빨치산의 딸인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런 말을 어찌 할 수 있었겠는가. 서슬 퍼런 군사독재 시대에. 그러니까 『빨치산의 딸』은 그때까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내 마음속에 쌓이고 쌓여 어떤 방식으로든 털어내야만 했던, 묵은 체증 같은 것이었다. 선생께선 걱정이 많았다. 내 문학의 금광이어야 할 이야기들을 설익은 나이에 탈탈 털어내는 게 걱정스러우셨을 테지. 고작 스물 셋이었지만 선생의 걱정이 옳다는 것쯤은 나도 알았다. 그런데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때의 핑계는 단순했다. 내 부모가 더 늙기 전에,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잊힌 역사를 복원해야 한다고, 딴에는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역사적 책무라고, 나는 나를 합리화했다. 긴 시간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금치산자로 살아온 내 부모의 명예를 회복시켜야만 내 존재의 정당성이 생겨서였다는 걸. 나는 그렇게 세상에 첫발을 내디뎠다. 서툴고 유치한 첫걸음이었다. 그에 대한 값은 오래도록 소설을 쓰지 못한 것으로 치렀다. 그러나 털어냄으로써 참으로 홀가분해졌다는 것을 이제야 고백한다.

『빨치산의 딸』은 다른 사람들은 물론 나조차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내 삶에, 내 문학에 영향을 미쳤다. 책을 쓰는 동안 나는 일 년 가까이 매일 서너 시간씩 부모님의 구술을 들었다. 그중 어떤 이야기, 어떤 사람들은 내 마음에 똬리를 틀었다. 어느 순간 불쑥불쑥 마음의 표면으로 떠오른 그 이야기들과 함께 나는 나이 들어갔다. 그러면서 알게 되었다. 나는 묻혀 있는 역사적 사실을 발굴하고 기록하는 일에 재주도 관심도 없다는 것을. 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그 역사 속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을. 이를테면 이런 이야기. 젊은 여자와 늙은 남자가 지리산 어느 바위 뒤에 숨어 있다. 본선과 연락이 끊기고 보급도 끊겨 아픈 몸으로 기다시피 비상미를 숨겨놓은 장소에 도착한 그들이 발견한 건 알록달록 곰팡이가 핀, 허깨비처럼 가벼운 쌀자루다. 기어 오는 동안 날이 밝아 그들은 다시 어둠을 기다리는 중이다. 드디어 어둠이 내리고 저 멀리 사람 사는 동네에 불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한다. 늙은 남자가 말한다.
“저기가 내 고향 진주요.”

젊은 여자는 죽을 날 받아놓은 늙은이가 안타까워 자수를 권한다. 빨치산들이 총을 겨눠 어쩔 수 없이 짐을 날라주러 산에 들어왔을 뿐이라 하면 목숨은 구할 수 있을 거라고. 노인은 불빛에 시선을 둔 채 말한다.

“나는 조상 대대로 종놈의 집안에서 태어났소. 이 나이 먹도록 나를 동무라 불러주고 존댓말을 써준 건 당신들이 처음이오. 그 순간 나는 결심했소. 이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노라.”

나는 아직도 그 마음의 전부는 헤아리지 못한다.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한이 얼마나 컸으면 존댓말 한 마디에 처자식도 버리고 빨치산이 되었을까? 그 마음을 이해하려는 과정이 내 소설의 여정이었다.

『빨치산의 딸』을 쓴 덕에 좌파 작가라는 딱지가 붙었지만 나는 좌파도 뭣도 아니다. 내 부모가 펼쳐놓은, 지리산처럼 광대한 사람의 이야기 중 어떤 이야기에 마음이 끌려 그 마음을 이해해보려는 모지리에 불과할 뿐이다. 내가 때때로 이데올로기에 관심을 갖고 그런 소설을 쓰는 건 이데올로기 자체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상처 받은 사람들이 이데올로기에 목숨을 걸고, 그 수레바퀴에 치여 때로는 숭고해지기도, 때로는 잔인해지기도 한다. 그 요지경 속을 들여다보려는 시도가 나의 소설이다. 상처 입은 내 성장기의 토사물과도 같았던 『빨치산의 딸』 덕분에 여기에 이르렀으니 부끄럽기도 감사하기도 하다.

정지아
소설가, 1965년생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 『빨치산의 딸』, 소설집 『나의 아름다운 날들』 『자본주의의 적』, 에세이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