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 위 패스포트
그 모든 골목마다 두고 온 것들

-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 노트 위 패스포트
  • 2023년 겨울호 (통권 90호)
그 모든 골목마다 두고 온 것들

-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바닷가 작은 마을, 피란의 풍경    

 

돌아오는 여정은 무척 길었다.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를 주 본거지로 하고 지낸 3개월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 일정은 두 번의 공항 내 대기와 환승을 거쳐야 하는 긴 마무리였다. 류블랴나 공항을 떠나와 폴란드의 바르샤바 쇼팽 공항에서 22시간을 우선 대기해야 했다. 사실 그 정도의 시간이면 공항에서 벗어나 바르샤바 시내를 돌아볼 수도 있었지만 짐이 많았고,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은 짐보다 더 무거웠다. 그래서 나는 쇼팽 공항 안에 앉아 전면이 창인 탑승 대기석에 자리를 잡고서 비행기들이 이륙하고 착륙하는 것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같은 자리에서 내내 노을이 지는 것도, 파란 저녁 하늘이 공항 너머로 짙어지는 것도, 밤의 조명들이 일렁이는 것도 보았다. 누웠다 일어났다를 여러 번 반복하며 까매졌던 하늘이 비행기들 뒤쪽으로 다시 어슴푸레 밝아오는 것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그 풍경들 사이에서 목마르게 지난 3개월을 자꾸만 떠올리고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예술가 해외 레지던스 프로그램으로 3월 말에 출국한 나는 3개월 동안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를 주 본거지로 하여 머물렀다. 굳이 주 본거지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3개월 중 5월은 내내 스페인·프랑스·이탈리아·체코·오스트리아·독일에서 문학행사를 하느라 류블랴나에서 왔다 갔다 하는 일정을 소화했기 때문이다. 작가명과 실명을 다르게 쓰는 내가 작가명의 정체성으로 3개월을 보내며 얼마나 많은 추억들을 만들고 왔는지 노트에 다 적자면 책 한 권을 만들겠지만, 지면을 위해 고르고 고르다 슬로베니아에서의 기억들을 주로 전하기로 한다.

 

류블랴나의 첫날 숙소로 이동하던 차 안에서 본 풍경     

 

류블랴나에 도착하던 날의 날씨는 내 평생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씨 중 하나가 될 것 같다. 체류 기간 동안 잊을 수 없는 다른 하늘들도 많이 만났지만 첫 번째 날의 날씨는 공항으로 픽업을 나온 선생님도 놀라워했던 날씨였다. 맑은 하늘과 비구름이 반반씩 공존하는 데다, 비바람이 불고, 천둥, 번개가 같이 쳤다. 그리고 그 하늘 아래로 보이는 고산 지대에 쌓인 눈까지, 나는 그날 공항에서 숙소까지 이동하는 차의 조수석에서 세상의 모든 날씨를 내내 보고 있었다. 류블랴나는 그렇게 나를 맞이해주었다.

 

높은 건물이 많지 않아 시야에 걸림이 없이 드러나는 하늘과 공기가 아주 깨끗했고, 차량이 많지 않았으며, 공유 자전거와 개인 자전거들을 손쉽게 도시 여기저기에서 사용하고 거치해 둘 수 있었다. 자전거를 무서워해서 타지 않는 나는 류블랴나에서 자전거를 타는 경험을 하지 못한 게 무척 아쉬운데, 꼭 자전거 타기를 연습해두었다가 언젠가 다시 류블랴나에서 자전거를 타며 도시를 돌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류블랴나 숙소 앞 전경    

 

4월은 류블랴나에서의 생활에 조금 적응을 하며 문학행사를 마쳤고, 5월은 유럽의 다른 6개국을 넘나들며 한 달 전반에 걸친 문학행사 일정들을 모두 마쳤다. 6월 초 한 주간은 너덜너덜해진 심신을 달래면서 쉬다가, 더 늦기 전에 다녀오고 싶은 곳이 있었다. 그곳은 슬로베니아 국경 중 바다에 유일하게 닿아 있는 피란 만에 위치한 피란이라는 작은 마을로, 이름조차도 마치 한국어의 피난과 비슷한 느낌이라 더욱 다녀오고 싶은 곳이었다. 귀국을 얼마 남기지 않은 조바심과, 정리되지 않은 내 머릿속의 전쟁들로부터 진정 피난의 시간이 필요했다. 급히 숙소를 찾아 예약하고 1박 2일로 피란을 방문했다. 한국에서는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의 촬영지로 알려져서 한국 관광객들이 늘어났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피란을 방문했던 시간 동안 한국 사람들을 제법 많이 볼 수 있었다.

 

애정이 듬뿍 느껴지게 꾸며진 자전거    

 

피란은 아주 작고 예쁜 바닷가 마을이었는데, 높은 지대로 올라가서 피란의 풍경을 보고 있으면, 붉은 지붕들로 가득한 건물들이 요새처럼 둥글게 선을 그리며 배치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건물들 사이를 헤매고 다니면서 많은 골목들을 만났다. 성 조지 성당 근처에 있는 긴 그래피티 돌담 옆을 걸었고, 아드리아해의 물색을 보면서 한참 넋을 놓기도 했다. 골목골목마다 가득 피어 있는 꽃나무들도 인상적이었다. 한참을 걷다가 숙소로 돌아와 잠시 눈을 붙이고는 석양을 보러 다시 나왔다. 아쉽게도 해 질 무렵의 하늘은 흐려서 기대했던 붉은 바다의 석양을 만날 수는 없었지만, 피란의 인어상 뒤로 보이는 흐린 날의 석양도 충분히 넘치게 아름다웠다.

 

피란 항구의 풍경    

 

성 조지 성당 내부     

피란의 인어상은 방파제의 한 조각처럼 보일 정도로 존재감이 크지 않았지만,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덩그러니 방파제 위에 올라가 있는 피란의 인어상을 보면서 나는 류블랴나의 프레셰렌 광장에 있는 어떤 뮤즈의 조각상을 떠올렸다. 프레셰렌 광장에는 슬로베니아의 민족시인이라는 프레셰렌의 동상이 있고, 그 동상이 바라보는 방향의 건물에는 그가 짝사랑했다는, 그의 뮤즈였다는 율리아 프리믹이라는 여성의 조각상이 새겨져 있다. 나는 이렇게 상으로 조각되어 버린 것들 중 특히 대상화의 극에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슬프게 여긴다.

이 대단한 시인이 어떤 대단한 짝사랑을 했는지 그 시절에 그들의 곁에 내가 존재하지 않아 모르겠지만, 죽어서도 누군가의 짝사랑 상대로 조각되어 사람들에게 끝없이 기억되는 일을 그 뮤즈는 바랐을까. 인어는, 이렇게 덩그러니 홀로 만들어져 낮도 밤도 없이 누군가가 만지고 함께 사진을 찍고 끌어안는 끝없는 대상화의 대상이 되는 것을 원했을까. 나조차도 그렇게 인어상을 바라보며 쓸쓸한 대상화를 하고서는 먹먹해져서 미안한 마음으로 피란에서의 밤을 보냈다.

다음 날, 바닷가의 버스정류장 앞에서 류블랴나로 돌아오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보니 피란에 있는 내내 신기하게 바닷내음에 계속 꽃향기가 섞여 왔다는 걸 깨달았다. 익숙한 것 같은 그 꽃향기가 어떤 꽃의 이름인지 알 수가 없어서 조바심이 났다. 지금의 세상은 인터넷의 대형 포털 사이트에서 스마트 검색 기능을 제공하는 세상이다. 그래서 이미지를 검색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향기를 검색하는 것은 내가 알기로는 아직 불가한 일이었다. 내심 마음이 초조해졌다. 이 향기의 이름이 알고 싶어서 발이 저절로 동동 굴러졌다. 가장 가까이에 무더기로 핀 꽃을 찍어 검색을 했더니 아마도 스타자스민이라고 부르는 꽃인 것 같았다. 자스민의 한 종류인 꽃이니 익숙한 듯하면서도 바닷내음에 섞여서 낯설게도 느껴진 게 아닌가 싶다. 별 자스민이라니, 이름도 너무 예쁜 꽃이네 싶었다.

 

피란에서 본 아드리아해의 물색     

피란의 골목길   

 

그 향기의 이름을 알고 싶어서 끙끙댔던 그 잠시의 순간에 대해, 버스를 타고 류블랴나로 돌아오는 내내 생각했다. 이름을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 나는 더 이상 애정이 없었던 걸까. 다르게 보기를 할 수 없게 된 걸까. 이름, 존재를 모르던 장소, 사물에 대해서는 궁금해 하고 찾아볼 애정이 아직 있는데, 나는 그 외의 것에 대해서는 사랑을 잃은 걸까. 특히 사람에 대한 사랑을 잃은 것은 아닐까. 이름이 있든 없든, 사람에 대해서 더 이상 궁금하지도 않아져버린 것 같은 엄청난 무기력감이 나를 힘들게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자주 길을 잃곤 했다. 주변의 것들에 정신이 팔리면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중요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러다 보면 길을 잃었다. 류블랴나와 피란으로 떠나면서 어쩌면 나는 더욱 길을 잃으러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새로운 것들에 마음을 놓아두고 길을 잃고서는 돌아오지 못하려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피란의 인어상    

하지만 그 바닷가의 버스정류장에서 향기의 이름을 알고 싶어 안타까움에 동동거렸던 그 순간이 풍경의 색깔들을 바꾸어놓았다. 나는 길을 잃지 않고 돌아올 수 있었다. 내가 이름을 알고 있던 것들의 풍경들을 다시 그리워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별을 보며 이정표를 세우고 돌아올 길을 정할 수 있게 되었다.

6월 말의 귀국을 앞두고 꼭 다녀오고 싶은 두 곳을 하루에 방문했다. 바로 슬로베니아의 수도로서의 도시 류블랴나를 디자인하고 건설하는 데 여생을 바친, 유럽의 3대 건축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요제 플레치니크의 생가와 그가 묻힌 시립공동묘지였다. 5월에 문학행사들을 다니면서 의도치 않게 피카소, 모차르트, 베토벤의 생가를 방문했었는데, 이로서 계획하지 않았던 생가 투어를 멋지게 마치게 된 셈이었다. 어떤 예술 장르의 예술가이든지 생가에 갈 때마다 특히 그들의 작업실을 즐겁게 보고 왔는데 특히 플레치니크의 작업실들은 너무 좋았다. 글과 그림 작업을 다 하는 나로서는 그의 작업실 풍경이 너무도 친숙하고, 내가 갖고 싶은 작업실의 모습을 하고 있기도 했다. 플레치니크 생가는 가이드 투어를 신청해서 볼 수 있는데, 방문한 날 타이밍 좋게 다른 관람객이 없어서 단독 투어로 천천히 살펴볼 수 있었다.

 

프레셰렌 광장의 프레셰렌 동상     

플레치니크는 자신이 건축한 현장에서 남게 되는 지붕, 기둥 등을 자신의 집에 모아두었다. 플레치니크 생가의 겨울 정원이라는 공간 바닥을 보면, 바닥의 돌들도 자신이 건축하던 현장에서 남은 돌들을 가져와서 만들었다고 한다. 좀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6년 전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구엘 공원을 투어하면서, 유럽의 3대 건축가 중 또 다른 한 명의 괴팍한 예술가인 가우디가 구엘 공원 탑에 자신의 커피잔들을 잔뜩 가져와서 박아 넣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가 생각났다. 글조각들을 아까워서 버리지 못하고 잔뜩 가지고 있다가 새로운 작품들을 만들 때 박아 넣기도(?) 하는 나에게도 그 천재들의 괴팍함이 비슷하게라도 존재하는 거라면 좋겠다며 실없이 웃었다.

플레치니크의 생가에서 나와 그가 묻힌, 역시 그가 디자인하고 건축한 시립공동묘지인 잘레에 방문했다. 엄청나게 큰 규모의 공동묘지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과 꽃, 조명 등을 놓아두고 기리고 있었다. 누군가의 이름이 붙여졌을 생가에서 시작해 그 이름들을 기억해두고 싶어 만든 공간에서 여행을 마치고 나니, 나의 모든 여정은 이름에서 시작해 이름으로 마무리지은 여행이 아니었나 싶어졌다.

 

요제 플레치니크 생가 중 작업실    

류블랴나 시립공동묘지 잘레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의 바르샤바 쇼팽 공항에 앉아 3개월의 추억을 목마르게 되새김질하던 그 22시간을 생각한다. 류블랴나와 피란, 그리고 문학행사를 위해 방문했던 여러 나라의 골목골목마다 두고 온 나의 마음 조각들을 생각한다. 그것들을 드래곤볼 모으듯 주워 모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안다. 내 조각들은 그 골목들마다 머무르며 햇살을 쬐고 비를 맞고 바래다가 또다시 꽃이 피는 계절이면 그 꽃의 색을 입고 바람이 불면 그 바람 냄새를 머금으며 내 것이 아닌 것으로 점점 변해가겠지.

한국에 두지 않으려고 했던 나의 마음들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어디에도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고 끝없이 부유하는 나는 집이 없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3개월간의 짧지도, 길지도 않았던 여정을 통해 나는 세상에 많은 집을 둔 사람이 되었다. 앞으로도 더 많은 집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골목골목마다 두고 온 내 조각들이 햇살을 쬐고 비를 맞고 나무로, 꽃으로 자라나 내 글들의 집이 되어줄 것임을 알아서, 부유(浮遊)하던 나는 부유(富裕)한 기분으로 이 여행을 마칠 수 있었다.

정여랑
소설가, 어린이책 작가, 1982년생
장편소설 『5년 후』, 소설집 『언니 믿지?』(공저), 어린이책 『엄마 나무를 찾아요』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