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색화가 정종미 선생과의 대화
- 채색화가 정종미 선생과의 대화
도재기
경향신문 문화부 선임기자, 1965년생
저서 『국보, 역사로 읽고 보다』
정종미
화가, 전 고려대학교 디자인조형학부 교수, 1957년생
개인전 20여회, 단체 및 초대전 다수, 대표작 <종이부인> <여성성에 바치는 헌사> <현대산수> 연작 등, 저서 『한국화의 재료와 기법』 『우리 그림의 색과 칠』
_작가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고 짓는 사람이다. 그림이든 설치작품이든 시든 소설이든 그 창작물로 의사소통한다. 자신의 말, 발언을 대신한다. 정종미 작가에게는 그림이 그렇다. 그는 굳이 따지자면 한국화(동양화)가, 더 따지고 들면 채색화가다. 또한 전통 채색화의 재료·기법 연구 권위자이기도 하다. 우리는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서구 문화의 급격한 유입 등 격동의 근현대사 속에서 다양한 전통문화의 아름답고도 가치 있는 요소들을 참 많이 잃고 또 잊었다. 회화 분야도 마찬가지다. 정종미 작가는 고구려 고분벽화, 고려 불화, 조선 회화로 이어지다 사라진 안료·염료·종이 같은 여러 재료, 콩댐·염료채색 같은 각종 기법을 연구한다. 그리고 직접 되살려 작품에 녹여낸다. “그림” 하면 캔버스 유화를 떠올리는 서구 중심의 한국 현대미술에서 한국 채색화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 세계 속에 한국화의 지평을 확장시키는 것이다. ‘눈 밝은’ 이들은 화면 속에서 그의 예술성·창조성, 나아가 여성주의·생명주의도 읽어낸다. 전통문화의 현대적 계승·진화이자, 문화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신선한 ‘글로컬(glocal)’이다. 정종미 작가를 서울 서촌의 한옥 ‘정종미 갤러리·카페’에서 만났다. 그의 예술세계를 오롯이 드러내는 작품들이 곧 그의 말인데, 인터뷰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는 게 아닌지….
도재기(이하 도) 작가님은 전통 채색 재료·기법의 연구·개발·적용으로 한국 채색화의 현대화·국제화에 이바지한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작가님의 미대 시절, 작품 활동 초기 만해도 미술계에서 채색화는 ‘왜색 그림’이라는 이유로 도외시되고 수묵화에 치우쳤을 텐데, 어떻게 채색화에 관심을 가졌습니까?
정종미(이하 정) 당시만 해도 동양화과에서 채색은 수묵의 곁가지로 여겨졌다고 할까요. 채색을 하면 교수님들이 말릴 정도였죠. 미술계 내부는 물론 밖에서도 채색화는 일본 회화라거나 격이 낮은 그림으로 여기고 단절시켜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했습니다. 저는 수묵이든 채색이든 다 열심히 배우고자 한 학생이었습니다. 물론 의구심이 일어났죠. 채색화가 일본 그림이고 격이 낮다면, 일제강점기 이전의 아름다운 고구려 고분벽화, 고려 불화 같은 전통 채색문화는 무엇이란 말인가…. 결혼하고 육아와 살림을 하면서 작업하다 보니 채색에 점점 더 관심이 가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공부를 하게 되고요.
도 작가님의 예술철학, 작품세계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전통 채색 재료와 기법의 연구, 활용입니다. 쓰기 쉽고 편한 시중의 재료도 많은데, 왜 굳이 잊힌 전통 재료를 힘들게 연구하고 직접 만들어 활용합니까?
정 그림은 문학, 음악과 달리 물질을 바탕으로 한 조형언어입니다. 화가가 재료를 알아야 하는 것,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닌가요. 좋은 작품을 하려면 사용하는 재료를 체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통 재료의 연구, 실험 과정에서 인대가 상해 고생하는 등 힘든 일도 많았죠. 힘들긴 해도 제가 만든 재료는 자연·천연 재료이고, 이를 작품에 쓸 때 아주 즐겁고 보람 있습니다. 사라지고 잊힌 전통 채색문화의 아름다움도 드러내는 일이니까요. 잊힌 전통 재료의 부활은 한국미술의 정체성 확립이나 문화적 자긍심 회복, 한국 회화의 영역을 넓히는 데도 크게 이바지한다고 봅니다. 최근 화가들이 화학 재료의 독성으로 고생하는 경우들도 있어요. 더욱이 코로나19 상황을 겪고, 친환경적 삶의 중요성을 생각할 때 전통 천연재료의 소중함을 더 확신하는 요즘입니다.
도 전통 재료인 천연 안료와 시중의 화학 안료, 튜브 물감은 색채나 색감, 화면 표현에 있어 차이점이 크나요?
정 전통 색채는 자연의 색입니다. 자연의 색은 무엇보다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줍니다. 상대적으로 은은하고 깊이감이 훨씬 있다고들 하죠. 그 이유는 색 안에 다양한 색들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작품에 실현하는 방법이 중색기법입니다. 튜브물감의 혼색기법은 근본적으로 그 한계가 있습니다. 튜브물감은 색이 강하고 색감에서는 충동적·공격적인 면까지 느껴집니다. 전통 천연 안료와 요즘의 화학 안료는 구성 입자나 발색 등 여러 면에서 많이 다릅니다. 화학 안료는 사용하기 쉽고 편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진정한 작가라면 재료에 대한 고민들을 좀 더 깊이 했으면 좋겠습니다.
도 전통 색채와 채색기법을 처음으로 정리한 저서 <우리 그림의 색과 칠> (2001)은 여전히 미술계 안팎에서 회자됩니다. 올봄에는 유화 물감들과의 비교 등을 포함한 <한국화의 재료와 기법>을 펴냈는데, 본격적 재료학서로 주목받습니다.
정 대학에 15년 있으면서 미술계의 모순을 많이 접했습니다. 특히 재료학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니 학생들은 재료에 관심이 적고, 나아가 여러 오류까지 배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세계적 작가가 나오기를 고대하면서 정작 교육은 전혀 딴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국내에는 재료학 연구자가 거의 없는 상황입니다. 이 상태로 가면 오류만 양산이 될 듯해 오류를 바로잡고자 책을 냈습니다. 사라진 전통 회화의 채색기법을 발굴하고 현대적으로 계승해 알리는 것, 재료학의 기본을 체계화시키는 게 절실하고 시급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도 <한국화의 재료와 기법>에서 국내 미대의 재료학 부재, 미대 학생들과 작가들의 무관심을 꼬집었습니다. 교육에서 재료학이 부재하다 보니 한국 미술계는 역사와 전통의 상실, 자생적 고유성과 주체성의 약화, 문화적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고 지적하기도 했고요.
정 미술가에게 재료의 이해는 가장 기본으로 전쟁터 군인의 무기와 같은 것이죠. 그런데 우리 미술교육은 이런 근본적 기초교육은 무시하고 예술성, 조형성만 강조합니다. 그동안 미술사가 양식사에 치우친 것도 영향을 주었을 겁니다. 서구 중심이다 보니 전통 재료에 관심, 연구는 더 미진하죠. 선조들은 이미 수천 년 동안 여러 재료를 사용했습니다. 그 재료들이야말로 우리의, 한국의 역사와 전통에 뿌리를 둔 고유하고도 주체적인 조형언어를 담기에 가장 좋은 재료가 아닐까요. 수천 년을 동고동락한 닥종이와 우리의 성정이 비슷한 것처럼…. 재료라는 물질을 통해 우리가 누구인지, 문화적 정체성을 더 잘 알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전통 재료를 통해 한국 미술의 자생적 고유성을 확보하고 국제적 보편성을 담아내면 좋지 않겠습니까. 재료학 연구는 한국미술의 정체성 확립이나 문화적 자긍심 회복, 작가의 질적인 성장 같은 여러 면에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도 미술 애호가들이 볼 때 한국 미술계에는 아직 용어의 개념·구분이 정리되지 않아 혼란스럽습니다. 서양 유화는 그냥 ‘그림’ ‘회화’인데, 왜 ‘동양화’, ‘한국화’로 부르고, 그나마 한국화·동양화의 개념 정리도 확립되지 않아 제멋대로 쓰입니다. 수묵화와 채색화 관계도 애매한 부분이 있죠. 미술사·이론도 사대적이라 할 만큼 서구에 치중된 면이 있습니다. 작가님은 그동안 서양 대표 회화 양식은 ‘유화’(油畵), 동양 회화는 ‘교화’(膠畵)로 정리해야 한다며 재료학 연구가 해결책이라고 밝혀왔습니다.
정 20여 년 전 <우리 그림의 색과 칠>을 쓸 때 용어 때문에 굉장히 힘들었어요. 동일한 유형의 책도 없었고, 한글 용어가 없다 보니 용어부터 제가 찾아내거나 정의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공부하다 보니 이미 ‘교화’라는 용어가 있는데도 쓰지 않았더라고요. 회화 종류는 전색제에 의해 정해집니다(전색제는 안료에 섞어 화면에 색을 드러내고 막을 형성해 고착하는 회화의 핵심 재료로 흔히 용제·미디엄으로 불림). 전통 접착제인 아교를 전색제로 쓰면 ‘교화’, 서양 회화는 아마유 같은 기름을 전색제로 쓰니 ‘유화’인 거죠. 아크릴 수지를 쓰면 아크릴화, 아라비아검이라면 수채화, 계란노른자라면 템페라입니다. ‘교화’, ‘유화’가 ‘동양화(한국화)’, ‘서양화’보다 회화 용어로는 합리적이지 않습니까. ‘교화’를 사용한다면 수묵·채색의 이분법적 대립도 없는 것이죠. 재료학의 부재가 개념과 용어의 혼란, 교육의 허점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재료학을 알면 동서양화, 수묵과 채색 등을 구별할 필요 없이 회화로 통합돼 서로 벽을 넘나들며 보다 생산적으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똑같은 한국 사람이 그린 그림이 동서로 나뉘는 게 이상한 일 아닌가요. 미국이나 유럽을 가보면 ‘웨스턴 페인팅’이란 용어가 없고 그냥 ‘페인팅’이죠. 우리도 ‘회화’로 가야 하는데, 재료를 이해하면 용어 문제도 금방 답이 나오죠. 사실 우리 고미술사를 보면 유화가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고 유화를 꼭 서양그림이라는 식으로 표현해야 할 근거도 없어요. 유화도 서양의 그늘 아래서가 아니라 우리 미술로 건강하게 자리 잡아야 하고, 작가들은 동서의 재료를 이해하고 이 중 자신에게 맞는 재료를 선택해 그리면 됩니다. 그런데 아예 선을 긋고 벽을 세워 시작하는 것은 재료학의 부재, 무지 때문입니다.
도 전통 재료·기법 연구와 활용에 있어 중국, 일본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정 일본과 중국은 적어도 재료에 있어 서구와 일정 부분 구별되는 자생적 고유성, 국제적 보편성을 확보했다고 봅니다. 특히 일본은 전통문화를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어서 그런지 훨씬 선진적이고 자리가 잡혔습니다. 전통 재료의 연구·개발이 꾸준히 이어졌고, 실제 작품 활용도 활발합니다. 유화가 표현해 낼 수 있는 모든 영역을 일본화의 채색기법으로 가능하게 만들었다 평가됩니다. 중국은 일본보다는 떨어지지만, 상당히 빠른 속도로 연구가 진행 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서구 미술을 좇기에 바빠 역사와 전통은 없고, 현재와 현대만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문화적 자생성·독립성을 가질 때 비로소 진정한 문화선진국이 되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한국미술도 국제적으로 더 주목받고요.
도 역사와 전통은 없고, 현재와 현대만 있는 것 같다는 표현이 아프게 다가옵니다. 그렇다면 대학, 미대 학생들과 작가들, 비평가, 컬렉터, 미술관 등 미술계 각 주체들이 지금부터라도 해야 할 일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정 미술계 주체 모두 저마다의 여건 속에서 재료, 재료학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대학에서는 재료학을 기초교육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작가들 경우 재료를 알면 작품이 더 좋아질 듯한데, 배우지 않다 보니 얘기를 해줘도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재료학 교육이 없다 보니 창작에서도 재료·질료적 관심보다 양식성에 치우칩니다. 작가들이 뒤늦게 깨닫고는 충격을 받기도 하죠. 지금의 재료학 부재는 전통 재료나 기법의 장점을 모르게 만들고 오히려 서구에 치우치게 하는 것 같습니다. 미술사 측면에서도 우리 미술사는 재료가 빠진 양식사 중심입니다. 심하게 얘기하면 반쪽 미술사죠. 재료학 관점에서 미술사를 다시 보고, 비평 문제를 고심하는 시도들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재료는 작품의 예술성은 물론 수명과 보존의 핵심적 요소이기도 합니다. 컬렉터가 고심 끝에 소장한 작품이 보존성 등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어떨까요. 컬렉터들이 최소한의 재료 지식, 더욱이 천연재료에 관심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도 대표작으로 한국 채색화의 현대화, 한국화의 영역을 확장했다는 평가의 ‘종이부인’ 연작을 꼽을 수 있습니다. 미학적 성취와 더불어 종이를 비롯한 전통 채색 재료·기법 연구 성과를 화면 위에 실제 구현해냈으니까요. 작품을 한 계기가 있었을까요?
정 젊은 시절 미국 체류 시기에 종이공방에서 전 세계 종이를 접하고 분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종이로서, 미술재료로써의 우리 닥종이(전통 한지)가 얼마나 우수하고 가치 있는 것인지 비로소 깨달았죠. 한편으론 한국 여성 이민자들의 삶을 접하면서 닥종이가 한국 여성의 성정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이후 그 연장선상에서 ‘종이부인’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닥종이는 염색으로 매우 아름다운 색감을 나타낼 수 있고, 전통 콩댐 기법도 아주 잘 받아냅니다. 서양의 면지나 동양의 화선지로는 아예 불가능하거나 한계가 분명하죠. ‘종이부인’은 어머니의 품, 고향의 맛 같은 그런 정서가 느껴지면서 전문가도 일반인도 다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작가로서, 한 여성으로서 저도 많은 생각을 한 작업입니다.
도 ‘종이부인’ 연작은 작업 초기 무명의 여성들에서 이후 유화부인, 허황후, 선덕여왕, 허난설헌, 황진이, 매창, 논개, 명성황후, 유관순, 나혜석 등 역사 속 여성들의 삶과 가치관을 재조명합니다. 특히 여성주의적 측면에서 많이 해석됩니다. 작품을 통해 강조하고자 한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정 어린 시절 어느 날, 집에 모르는 할머니 한 분이 오셨습니다. 병으로 길거리에 쓰러진 일본군 강제 위안부 출신 할머니를 아버지가 모시고 와 치료하고, 이후 돌아가실 때까지 우리 가족과 함께 지낸 겁니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들을 키워주고 집안 살림을 맡아준 그분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그분에게서 제 어머니를 비롯해 해외 이민 여성들, 한국 여성들의 빛바랜 노동, 잊힌 희생과 고통, 삶을 떠올리곤 합니다. ‘종이부인’에는 지금의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그분을 비롯해 수많은 여성들의 희생을 기억하며 위로하고 경배하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또 조선시대 초상화가 남성의 것이기에 화가로서 여성들의 초상도 만들어 주고 싶기도 했죠. 한국 여성들의 성정과 가장 잘 어울리는, 가장 한국적인 그림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전통 천연안료와 한지·모시·비단 같은 수제 재료, 전통 채색기법으로 작업했죠. 작업을 하면서 제 자신도 정화되는 듯, 위로 받는 듯 했습니다.
도 ‘종이부인’ 외에 현대 한국인의 이상향을 담은 추상 산수 등 많은 평면작업이 있는데, 근래에는 평면을 넘어 대형 설치작업도 하십니다. ‘여성성에 바치는 헌사’, ‘진혼 사미인곡’ 등의 전시는 마치 숭고한 샤머니즘 제례의식, 과거와 현재를 소통하는 영매를 떠올리게 합니다.
정 화가는 일종의 무당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에게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요. 성장하면서 어머니를 비롯해 수많은 여성들을 만났습니다. 그들 모두 저마다의 삶이 지닌 가치와 의미들이 있고, 그것을 보고자 했습니다. 그 여성들을 위해 멍석을 깔아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굿판을 벌인 셈이죠. 하나의 의식을 통해 안타까운 삶을 살다가 간 여성들을 불러 위로하고 복을 바라는 행위로 설치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설치작업은 평면작업과 달리 그 만의 매력, 재미가 있습니다. 여건이 되면 한지와 전시 공간 특성을 적극 활용하는 ‘장소특정적 작업’ 같은 그런 설치작업으로 더 확장할 생각입니다.
도 기후가 변화를 넘어 위기·재앙으로 다가온 시대입니다. 인간과 자연, 인간과 비인간 생명 간의 공존공생, 대전환 속 균형과 조화가 강조됩니다. 이 시대에 미술계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까요?
정 당연히 미술계를 포함해 문화예술계 주체들도 저마다 보다 지속가능한 미래를 고민하고, 또 친환경 작업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이제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죠. 미술 재료학으로 보면, 전통 천연 재료들이야말로 이 시대에 그 중요성이 더 커집니다. 인간도 자연재인데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자연재료 아닐까요(웃음). 저는 지금 우리가 고민하는 현대문명 문제들의 해답이 선조들의 삶과 철학에 상당 부분 이미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을 뿐이죠. 동양미학의 요체는 생명주의입니다. 생명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없을 진데, 다른 것들의 가치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게 이 시대 가장 큰 문제 아닐까요. 미술계만 하더라도 보다 근본적이고 깊은 고민 없이 눈앞의 상업성에 매몰되고, 편리함만을 좇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난 9월 대규모 아트페어인 키아프·프리즈 행사를 보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가는, 화가는 일종의 무당이라고 얘기한 것처럼 대중을 따라가기보다 선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도 앞으로 꼭 하고픈, 하고자 하는 주제의 작품이 있을까요?
정 여성에 대한 관심을 이전 작업들보다 더 확장하고, 나아가 자연·생명을 주제로 한 작업을 하려고 합니다. 자연·생명주의적 관점은 여성을 향한 관심과 연결되는 지점이 많습니다. 구체적으로 우주를 이루는 요소인 물과 색채를 결합시킨 시어적인 작업을 생각하고 있어요. 물의 속성, 흐름과 율동적 움직임 등을 현대적 감각의 전통 오방색으로 담아보는 겁니다.
도 최근 ‘K 아트’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해외 미술계의 관심이 많아지면서 다국적 갤러리들의 국내 진출, 한국 작가들의 해외 전시도 크게 늘고 있습니다. 한국 미술이 국제적으로 더 주목받고 인정받기 위해 미술계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정 미술도 한류가 될 수 있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쉽지 않다고 봅니다. 그동안 저의 여러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외국인들은 자신들에게 없는 것을 찾거나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해외 작품들과 차별화되는 한국미술의 고유성, 그러면서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담보하는 작품이 중요한 것이죠.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지금부터라도 재료학 같은 기초교육의 강화, 나아가 서구 미학과 균형을 이루는 근본적 미학·철학의 토대를 확보하는 교육이 절실합니다.
도 올해 초 대학을 퇴직하셨으니, 작가로, 연구자로 보다 많은 일을 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활동 계획을 들어 볼 수 있을까요?
정 재료학 불모지이므로 우선 재료학 강좌를 열 계획입니다. 학생들이든 작가들이든 필요한 분들이 들으면 그분들이 또 다른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다행히 ‘정종미 갤러리·카페’ 공간도 있습니다. 이 갤러리를 인문학적 허브 공간으로 삼아 재료학 강좌는 물론 인문학 강연, 공부 모임, 전시 등 다양한 활동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할 생각입니다. 편향된 한국미술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되는 전시, 세미나라면 더 좋죠. 보다 건강한 문화를 만들기 위한 각 부문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데 뭔가 일조하려 합니다. 개인적으로 내년 봄에 전시가 예정돼 있고, 한편으로는 재료학을 기반으로 한 구체적 실기 관련 책을 쓸까도 생각 중입니다. 사실 무엇보다 그동안 대학에 있느라 하지 못한 작업을 마음껏 해보려 합니다.
도 미술계를 넘어 한국 문화 전반의 주체성, 정체성 같은 거시적 생각들을 되새겨 보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새로운 사실들을 여럿 알게 되고, 교육의 중요성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긴 시간의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