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밭단상
비 카인드 리와인드*

  • 글밭단상
  • 2023년 겨울호 (통권 90호)
비 카인드 리와인드*

오래된 비디오테이프와 창 사이로 들던 오후의 햇빛. 옅은 먼지 냄새 같은 것이 내게는 오래 남아 있다. 어릴 적 내가 살던 아파트 단지 앞에는 ‘영화마을’이라는 비디오 대여점이 있었다. 나는 유년기 많은 시간을 혼자 보냈고, 그 시간에는 대부분 비디오를 빌려 보거나 만화책을 읽었다. 대여점에 들어서서 규칙적으로 꽂혀 있는 비디오테이프와 만화책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다른 세계로 진입한 것만 같았다. 때로는 빈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두려워서, 그곳에 좀 더 머무르려 애를 쓰기도 했다. 모퉁이가 해진 책을 든 채, 정확히 이해하지도 못하는 글자를 따라 읽으면서. 그러다 보면 나는 어느 순간 이야기 속에 있었고, 그 안에 있을 때만큼은 외롭지 않았다.

열네 살이 되던 무렵 나는 살던 동네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했고, 그렇게 ‘영화마을’과는 자연스레 멀어졌다. 나는 더 이상 대여점이 아닌 극장을, 서점을 찾았다. 높은 해상도의 영상과 깨끗한 커버의 책들. 그때와 다른 공간과 이야기를 헤매면서도 나는 이따금 다 바랜 ‘영화마을’의 기억을 떠올리곤 했다.

보고 읽는 것과 쓰는 것의 욕망은 닮아 있는 구석이 있다. 그러니 나는 무엇이든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부터는 몇 편의 시나리오를, 대본을 썼다. 나는 이제 하나의 이야기를 지어 놓고 떠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몇 명의 인물들과 이별하고 나면, 나는 다시 혼자 남겨졌다. 시나리오를 쓰는 작업은 내게 듣는 일과 같았다. 인물들의 말에, 행동에 귀를 기울이는 일. 그들은 꼭 내게서 벗어나 자신만의 의지를 갖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무언가를 쓸 때만큼은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기분이 들었기에 그 기분을 믿으며, 나는 계속해서 썼다.

시나리오 작업이 듣는 일에 가깝다면, 소설 쓰기는 말하는 일에 가까웠다. 소설을 쓰기 위해 나는 나를 앞에 둔 채 오랫동안 서성여야 했다. 그리고 끝내 말하고 싶은 것과 쓰고 싶은 것,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의 글쓰기를 시작했다. 내가 머뭇거려도 문장은 계속해서 다음 문장을 데려왔다. 내 소설이, 나의 문장이 나를 이해해 주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 나는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었다. 자유로울 수 있었다. 누구에게도 이야기한 적 없지만, 나는 첫 소설을 쓰며 조금 울었다. 첫 소설을 마치고 난 뒤의 마음을 영원히 기억하게 되리라 직감했다. 나는 이제 내가 쓴 소설 속 인물들과 이어져 있음을 느낀다.

성인이 되고 언젠가 ‘영화마을’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대는 변화하고 사람들은 더 이상 비디오테이프라는 물질을 필요로 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 소식에 놀라지 않았으면서도, 어쩐지 마음 한편이 저릿해짐을 느꼈다. 공간이 사라진 자리에는 시간만이 남았다. 가사가 들릴 듯 말 듯 한 볼륨을 가진 음악과 어떤 평화로움. 눈을 맞추며 다정하게 대화해 주시던 사장님. 책장 사이로 보이던 어른들의 표정. 검은 봉지를 달랑거리며 돌아가던 길목의 풍경. 그리고 그런 장면들과 함께 흐르던, 어떤 시간만이.

나는 이제 작은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를 보며, 나무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 소설책을 읽으며 그 너머의, 바깥의 풍경을 본다. 꾸벅 졸고 있는 관객이나, 창 너머로 산책하는 연인들. 수풀 속으로 숨어드는 새들과 멀리서부터 쏘아지는 빛을 보면서. 서사 내부에서 바깥으로 연결되는 장면들을, 끝없이 반복되고 재생되는 시간을 생각한다. 그렇게 겹쳐지는 시간 사이에는, 내가 있다. 그리고 내 곁에서 함께 대화를 나누는 이들이 있다. 마침내 모든 이야기가 끝나면, 나는 고요한 집에 돌아와 그들과 오래도록 나눈 대화에 대해, 그 모든 시간에 대해, 쓰기 시작한다.

김여름
소설가, 제21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자, 1998년생
단편소설 「안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