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싸우지만 싸우지 않는 것으로 싸우는 일

- 기억으로서의 아버지 서영훈

  • 나의 아버지
  • 2023년 겨울호 (통권 90호)
싸우지만 싸우지 않는 것으로 싸우는 일

- 기억으로서의 아버지 서영훈

■ 서영훈(1920~2017) : 사회운동가, 언론인, 정치인, 평남 덕천 출생. 다석 류영모선생연구회 회장, 흥사단 이사장, 한국방송공사(KBS) 사장, 새천년민주당 대표, 대한적십자사 총재 역임, 저서 『평화의 도정』 『도산과 힘의 철학』 『숲이 깊으면 둥지가 많다: 서영훈 인생수상』 『자유시민 서영훈의 세상읽기』 『벽오동 심은 뜻은』 『평화의 계단』 『부름 받아 걸어온 길, 뜻을 따라 가야할 길』 등

 

아버지를 떠올리며 나의 아버지가 지니셨던 어떤 중심적인 생각이나 상을 떠올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 문학에도 아버지를 찾아 헤맨 무수한 작품이 있지만 이것이 존경스러운 아버지라고 감동적으로 기억하여 구성해 낸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이문구 선생의 『관촌수필』의 ‘아버지’가 내가 알고 있는 그 드문 예라고나 할까요. 폭력적인 아버지, 도그마에 매몰되어 가부장의 책임을 외면한, 그리하여 원망스러운 아버지, 무능한 아버지가 우리 작품에는 훨씬 더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가부장으로서의 책임과 권위를 온전하게 가져보지 못한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이기 때문이며 좀 더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근대 가족의 속성 자체가 부성의 권위를 확립하는 데 불안정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표현을 씁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부재하다.’ 그렇지만 또 이렇게도 씁니다. ‘그래도 우리 아버지이다.’ 완전한 권위로 가족 공동체에서 존경받는 아버지는 이론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이는 좋은 이웃은 죽은 이웃이라는 말과도 상통하는데 존경받는 아버지는 사생활이 없는, 어떤 개인적 취향이나 남성적 경향도 배제된, 이념으로서의, 책임감만 있는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 아버지를 기억하여 말해보라는 요구는 외설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권위가 없다는 것은 다 알고 있으니 그 이면에 대해, 즉 그래도 우리 아버지인 이유에 대해 말해보라는 것. 아버지에 대한 고백을 강요당하는 것이기도 하여 이 원고청탁은 괴롭습니다. 그럼에도 서너 차례 거절한 후 더 이상의 거절이 민망하여 청탁을 받아들인 지금 조금 난망합니다. 아버지에 대해 기억나는 것이 무엇인가. 아닌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 이번 추석을 보내며 떠오른 아버지에 대한 기억 하나만 적고자 합니다.

 

유영모 선생 묘 앞의 아버지(오른쪽)와 박영호 선생   

 

계화예술공원에 세운 아버지(왼쪽 세 번째)의 시비 앞에서 김남조, 전덕기 시인 등과 함께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6년이 되었습니다. 1923년생이니 살아계셨으면 올해 만 100세가 되는 해이지요. 서울 현충원에 모셨고 시간 날 때마다 자주 찾아뵈었습니다. 그러다 올해 연초에 아버지와 64년 세월을 함께하셨던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니 부모님 모두 여의게 되었네요. 지난 추석에는 모처럼 상을 차려 부모님이 함께 계신 산소에 갔습니다. 예법에 익숙하지 못해 산소 앞에서 지내는 차례에도 서툴렀지만, 함께 갔던 가족들에게 부모님과 지냈던 과거 제사와 차례 이야기를 해주며 부모님 생각을 나누고 올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주 젊은 시절부터 기독교인이 되어 평생 신앙인으로 사셨습니다. 늘 읽으시던 성경은 책이 크게 부풀어 있었지요. 한 교회에 65년 넘게 다니셨습니다. 그런데 명절 차례와 조부, 증조부 제사를 빠짐없이 지내셨습니다. 기독교인인데 제사를 지낼 수 있을까. 어릴 때는 이런 의문을 전혀 품을 수가 없었지만 이제 생각해 보면 선친께서는 이런 딜레마를 늘 염두에 두고 계셨지만 나름의 방식을 가지고 계셨지요.

제사 지내는 방식은 이랬습니다. 상을 차리고 향불을 피우고 절을 하며 잔에 세 번 기울여 잔을 채우길 두 번, 그리고 첨작도 하고, 계반삽시(啓飯揷匙)나 헌다(獻茶) 즉 식사와 숭늉 바치는 의례도 약소하긴 하지만 빠지지 않고 하셨습니다. 그러고는 사이사이에 기도를 하거나 찬송가를 부르고 성경을 읽었지요. 신위나 사진 대신 마음속으로 떠올리는 방식을 끼워 넣어 기독교가 용허하는 차원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논어』의 공자 말씀이라 하며 “제사를 지낼 때는 조상님이 와 계신 것처럼 해야 하고 정성이 중요하다”는 말씀도 자주 있었습니다. 제게는 이런 제사가 매우 자연스러웠지요. 하지만 당시로서는 좀 낯선 것이 아니었을까요.

주지하듯 우리 문학에는 염상섭이라는 작가가 있지요. 그의 대표작이 『삼대』라는 작품인데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장편소설입니다. 여기에 보면 조부와 부친의 충돌 장면이 나옵니다. 제사를 중히 여기는 조부와 교회 장로인 부친 사이의 충돌입니다. 서로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여 부자지간의 절연으로까지 치닫습니다. 제사 문제로 두 분은 결국 갈라서고 서로 말길도 막히지요. 조부는 많던 재산을 손주에게 물려줍니다. 전통적인 사고와 기독교가 서로 용허하지 못하는 장면입니다.

이 작품을 생각하면서 한편으로 아버지도 유교적 성향이 대단히 강하신 분이었지만 『삼대』의 부친 조상훈과는 달리 이런 제사가 가능했던 이유가 무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떠올린 생각은 아버지만이 아니라 우리 근대기에 일반적인 젊은 청년들의 생각이 그렇지 않았을까 하는 것. 톨스토이의 무교회주의,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 도산 안창호 등에서 받은 감회를 늘 말씀하셨지요. 나중에 함석헌 선생님, 유영모 선생님과의 긴 인연도, 해방 후 청년 간디협회 활동도, 그리고 흥사단 이사장으로 나아간 것도 이런 생각의 연장으로 봐야겠지요. 싸우지만 싸우지 않는 것으로 싸우는 일, 교회에 다니지는 않지만 기독교인으로 사는 일, 식민지 치하이지만 무실역행하여 미래를 도모하는 일, 기독교이지만 조상을 추모하여 제사를 지내는 일 등이 서로 상통하지 않을까. 다른 것들이지만 하나처럼 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이것이기도 저것이기도 한 것. 산소를 다녀오면 이런 생각을 어설프게 해보았습니다. 저보다는 유연하셨다는 생각 말입니다.

서경석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959년생
저서 『한국 근대 리얼리즘문학사 연구』 『한국근대문학사 연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