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에세이 - 길을 묻다
섬진강 들녘에서 창작판소리를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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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년 겨울호 (통권 90호)
섬진강 들녘에서 창작판소리를 생각하다

 

가수는 노래 따라가고 소설가는 이야기 따라간다고 했던가. 여행이든 답사든 낯선 고을에 닿으면, 그곳에 쌓인 이야기부터 찾아 듣는다. 책을 펼치고 활자를 읽는 것과 마주 앉은 사람의 말을 귀로 듣는 것은 차이가 크다. 등장공간을 살피고 등장인물의 발자취를 따르면, 이야기가 길라잡이처럼 저만치 앞서기도 한다.

전라남도 곡성에 갔을 때도 그랬다. 섬진강과 대황강의 정겨운 물줄기도 좋았고, 백 개의 골짜기마다 구석구석 자리 잡은 마을들도 아름다웠지만, 변변한 이야기가 없다면 집필실을 옮길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군데군데 세워진 안내판에서부터 낯익은 이름이 눈에 띄었다. 심청!

30년도 훨씬 전, 고전소설사 강의 시간에 판소리계 소설을 배웠다. 판소리계 소설은 각 지역의 다양한 전설과 민담을 바탕으로 창작되었는데, 이를 ‘근원 설화’라고 통칭한다. 곡성군이 심청을 유난히 강조하며 ‘심청 축제’를 열고 공원까지 조성한 것은 「심청전」의 근원 설화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김태준은 『조선소설사』에선 ‘관음사 연기설화’ 즉 원홍장의 효성을 중심에 두고 관음사 창건을 설명한 이야기를 심청전의 근원 설화로 꼽았다. 효녀 원홍장이 장님인 아버지 원량을 지극정성으로 모셨다는 것, 바다 건너 중국으로 가서 황후가 되었다는 것 등 이야기의 주제와 구성이 「심청전」과 흡사한 것이다.

또한 곡성은 소리꾼들이 산 공부를 하는 곳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여름이면 섬진강을 따라 남원과 곡성과 구례까지 와선 각자 마음에 드는 산에서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소리 공부에 매진했다. 지리산처럼 큰 산으로 들어가는 이도 있지만, 곡성의 동악산이나 동이산에서 여름을 나는 이도 적지 않았다. 2020년 가을 내가 곡성으로의 귀촌을 고민 중이라고 밝혔을 때, 소리꾼 최용석은 그곳에서 산 공부를 했던 젊은 날의 추억을 들려줬다. 그 산 그 골 그 물에선 아니리 한 구절이나 발림 한 동작도 허투루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목이 붓고 피가 날 때까지 소리를 내지르다 보면, 그 산을 거쳐 간 소리꾼들의 목소리가 메아리로 들려오는 착각이 인다는 것이다.


소설 집필 외에 내가 평생 짓고 싶은 것이 바로 창작판소리 사설이다. 왜 나는 이 일에 매료되었을까. 되짚어보면 역시 대학원 시절 본격적으로 판소리계 소설과 판소리 연구를 위해 읽고 들으면서부터였다. <춘향가>와 「춘향전」, <심청가>와 「심청전」처럼, ‘가(歌)’와 ‘전(傳)’의 거리는 가까우면서도 멀었다. 가(歌)는 소리를 할 판이 펼쳐져야 하고 소리를 들어줄 관객이 필요하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감각은 청각이다. 전(傳)은 판도 관객도 필요 없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감각은 시각이다. 판소리와 판소리계 소설의 선후 관계는 지금까지도 논쟁거리다. 판소리가 먼저 있고 판소리계 소설이 나중에 나왔다면 귀에서 눈으로 간 것이고, 그 반대라면 눈에서 귀로 간 것이다. 어느 쪽이든 중요한 감각을 달리하면서 같은 이야기를 즐겨온 것은 문학사적으로도 흔치 않은 사례다.

판소리와 판소리계 소설이 ‘같은 이야기를 즐겨 왔다’고 적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소리로 잘 들리는 문체와 문자로 잘 읽히는 문체는 다르지 않겠는가. 판소리 사설이 특유의 장단과 가락을 따라 흘러간다면, 판소리계 소설의 문장들은 맺고 끊음이 더 많고 분명하다. 귀로는 1분이든 10분이든 계속 들으며 따라갈 수 있지만, 눈으로는 한 장에 적어도 서너 번은 끊고 다시 시작해야 이야기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판소리계 소설은 시작부터 끝까지 하루 만에 완독할 수 있지만, 판소리는 완창이 쉽지 않다. 판소리가 큰 인기를 끌었던 조선 후기에도 완창은 하지 않고, 눈대목이라고 불리는 중요 대목들을 선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공연을 거듭할수록 인기 있는 눈대목들은 점점 사설이 덧붙으면서 이야기도 풍부해지고 분량도 늘어났다. 소설이었다면 적절히 분량을 줄여 균형을 맞췄겠지만, 판소리에서는 눈대목이 지나치게 늘어나더라도 괘념치 않았다.

고전소설을 전공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판소리계 소설을 더 집중해서 읽은 후 판소리 사설을 나란히 두고 비교하는 식으로 살폈다. 그러다가 박동진 명창의 판소리 완창들을 찾아 들으면서부터, 소설을 읽지 않고 판소리 사설만 즐기는 단계로 넘어갔다. 전통 판소리라 불리는 이 작품들은 소리꾼들에 의해 지금도 계승되어 불리고 있다. 클래식 연주자들이 작곡자의 악보를 그대로 따르듯이, 소리꾼들도 중요 사설을 빼거나 넣지는 않았다.

당대의 문제를 소리로 풀어내기 위해선 전통 판소리가 아니라, 창작판소리가 필요했다. 김지하의 담시 「오적」, 「소리내력」, 「똥바다」가 임진택에 의해 창작판소리로 불린 것을 시작으로, 80년대와 90년대 창작판소리가 공연되었다. 민중의 영웅들이 차례차례 창작판소리의 주인공으로 등장했고, 역사와 정치의 큰 고민들이 창작판소리 속에서 다뤄졌다. 대학이나 집회 현장에서 종종 창작판소리를 접했다. 전통 판소리와 같고 다른 점을 따져보긴 했지만, 내가 직접 판소리 사설을 쓸 생각까진 하지 않았다.

2015년 장편소설 『조선마술사』를 원작으로 한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소리꾼 최용석이 찾아왔다. 내가 쓴 역사소설을 바탕으로 창작판소리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때는 그가 창작판소리의 산실인 ‘바닥소리’의 창립 맴버로 대표를 역임해왔고, 또 <쥐왕의 몰락기>처럼 당대 현실을 비판하는 뛰어난 작품을 짓고 공연했는 줄 몰랐다. 몇 번의 만남 후, 소리꾼 최용석과 나는 ‘창작집단 싸목싸목’을 결성했다.

예를 들어, <가시리>와 같은 판소리극은 내가 원작만 제공하고 최용석 소리꾼이 사설을 쓴 작품이다. 이런 방식도 나쁘진 않지만, 나는 할 수만 있다면, 소설이 이미 있든 없든 내가 직접 사설을 쓰고 싶었다. 창작판소리 <달문, 한없이 좋은 사람>은 내 소설 『이토록 고고한 연예』를 원작으로 삼았는데, 사설까지 내가 썼다.


서울에서 ‘창작집단 싸목싸목’을 통해 창작판소리 작업을 하다가, 2021년 1월 1일부터 전라남도 곡성으로 집필실을 옮겼다. 글도 쓰고 농사도 지으며 마을소설가로 살기 위해서였다. 최용석 소리꾼은 이 귀촌이 우리에게 새로운 창작판소리를 만들 기회를 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서울에서 나는 곡성에서 생활하겠지만, 어차피 둘 다 새 작품을 함께 만드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곡성을 비롯한 섬진강을 이웃한 고을들에 붙어 다니는 단어는 ‘소멸’이다. 인구소멸 고위험지역인 것이다. 가장 먼저 고을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는 진단이 여기저기서 제출되었다. 마을이 없어진다는 것은 거기에 살던 사람들이 대대로 누려온 문화가 사라지는 것이다.

사람이 줄어든 만큼, 종다양성이 풍부해졌다는 시각도 있다. 서울의 10분의 9에 이르는 넓은 면적에 인구는 2만7천 명이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많고, 거기선 자연 생태계가 파괴되지 않고 유지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대도시들은 사람이 생활하기 편하도록 공간이 재배치되어 있지만, 곡성과 같은 농촌 고을은 사람을 위한 공간보다 야생동식물들의 공간이 더 넓은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만큼이나 사람과 동식물에 얽힌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중에서 몇 가지를 우선 모아서 작품으로 만들었다.

<섬진강 도깨비>는 섬진강에서 생선을 잡는 전통방식 중 하나인 돌살에 얽힌 이야기다. 강에 비스듬히 돌을 쌓아서 생선들을 한쪽으로 몰면, 거기에 그물을 치고 생선들을 거두는 방식이다. 그런데 강물이 깊고 물살이 센 곳은 돌을 쌓아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기 마련이다. 거친 물살에도 수백 년 동안 무너지지 않은 돌살이 있었으니, 이것은 사람이 아니라 도깨비가 쌓았다는 전설이 전해졌다. 나는 이 강 도깨비를 발에 탈을 쓰고 판을 노는 발탈 소리극으로 만들어 선보였다.
<약속나무>는 곡성의 마을마다 있는 고목들로부터 떠오른 작품이다. 죽곡면 삼태리에서 고목을 베기 전에 치목(稚木)에게 신령을 옮기는 이야기를 들었다. 왼새끼를 꼬아 서로 묶어 닷새 넘게 두어서 고목의 신령이 치목에게로 가도록 한다. 그리고 지극정성으로 음식을 장만하여 고목에 예를 드린 후에 나무를 벤다. 그다음부터 치목은 고목의 나이까지 더하여 존중받으며 살아간다. 나는 이것을 소리꾼 혼자 고목과 치목 사이를 오가며 이야기를 끌고 가는 창작판소리로 만들었다.

 

곡성으로 내려와 3년 동안 정성을 쏟은 것은 ‘섬진강 생태판소리 한마당’이다. 생태와 관련된 창작판소리를 공연하고 즐기는 축제를 연 것이다. 서울에서는 무대가 있는 공연장에서 창작판소리를 선보이는 식이다. 곡성에서는 전통 판소리에 익숙한 고을 사람들, 그리고 생태와 창작판소리에 관심이 있는 곡성 밖 사람들과 판소리를 다 함께 즐기는 판을 깔고 싶었다.

무대가 있는 실내 극장과 함께 폐교의 마당에 판을 연 것은 예전 판소리의 흥취를 되살리기 위함이었다. 가을마다 추수를 앞둔 들녘을 바라보며 3년 동안 한마당을 열면서, 창작판소리의 몇 가지 경향이라면 경향이고 한계라면 한계를 깨달았다.

첫째는 한마당에 오는 관객 대부분이 창작판소리를 어린이극으로 여겼다. 마을 어른들이 모여 함께 즐길 만한 창작판소리가 거의 없었던 것이 또한 사실이다. 둘째는 창작판소리에 대한 섬진강 고을 이웃들의 관심이 기대만큼 높지 않았다. 그 마을의 동식물과 사람들에 얽힌 전설을 작품으로 옮겼는데도, <춘향가>나 <심청가>처럼 전통 판소리를 들을 때는 들썩이던 어깨가 창작판소리를 접할 때는 불편하고 낯설어했다. 셋째는 판소리 한마당을 실력을 겨루는 경연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마당을 처음 준비할 때부터 생태에 관심을 둔 창작판소리를 공연하는 것만큼이나 나이와 주제를 주고 판소리를 서로 겨루는 대회를 열어보라는 충고와 제안을 받았다. 경연을 벌여야 참가자도 늘고 대회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3년 동안 ‘섬진강 생태판소리 한마당’을 꾸리면서, 새로운 작품도 쓰고 또 뛰어난 소리꾼들을 곡성으로 초청하여 다양한 공연도 선보였다. 그러나 이 축제를 계속하지 않고 멈추기로 한 이유는 창작판소리의 미래를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하기 위해서다. 도시를 기반으로 하는 창작판소리와 지방 농촌을 기반으로 하는 창작판소리가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와 대안이, 이론은 물론 작품으로도 필요하다.

지방 농촌 마을이 겪는 어려움은 서울과 수도권에 사는 도시인들은 상상하기 어렵다. 농촌이 지닌 문제를 다룬 문학이나 드라마나 영화가 끊긴 지도 오래되었고, 농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뉴스에서 충분히 다루지도 않기 때문이다. 도시인들에게 농촌은 추억의 한 페이지이거나 일 년에 한두 번 명절에 내려가는 곳이거나 여유가 있을 때 가끔 쉬러 가는 곳으로 전락했다.

내가 곡성에 와서 지은 창작판소리 사설의 문제는 대부분 옛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이다. 물론 점점 잊히는 이야기들을 모아서 기록하고 창작하는 의미는 적지 않다. 하지만 계속 이런 쪽으로만 창작을 이어가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 속엔 지금, 여기의 처절한 아픔이 없기 때문이다.

섬진강 들녘으로 오고 나선 지방 농촌에서 살아가는 날들의 어려움을 듣는 것이 일상이다. 점점 빚을 지고 점점 몸과 마음이 아프고 점점 외롭고 점점 약해진다. 술잔을 기울이면서도, 논두렁에 앉아서도, 마을길을 오가면서도 한숨과 탄식이 늘어난다. 군데군데 억울한 일이고 군데군데 성나는 일이고 군데군데 원통한 일이다. 3년 동안 나는 왜 그 절망들을 판소리로 옮기지 않았을까. 아직 3년밖에 되지 않았으니 좀 더 농촌에서 살아보고 써도 늦지 않다는 누군가의 충고를 자기변명으로 삼아버린 것일까. 지금 쓰지 못하는 것을 5년이나 10년이 지나면 쓸 수 있을까.

조선 후기 판소리가 각광 받은 까닭은 당대의 현실을 직시하고 풍자했기 때문이다. <흥부가>에 등장하는 흥부 가족의 처절한 가난을 보라. <춘향가>에 등장하는 변학도의 횡포를 보라. 그것은 작품 속 가난이자 횡포이면서 또한 작품 밖 현실의 가난이자 횡포였다. 그 가난을 바꾸려는 꿈, 그 횡포를 멈추게 하는 꿈을 소리꾼과 관객들이 다 함께 판소리 마당에서 꾼 것이다.

혼자선 장편소설을 쓰고 함께 모여 창작판소리를 만들고 싶다고 꿈을 접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지금까진 이 둘을 나눠 고민했는데, 결국 깊고 넓게 생각해야 할 방향은 하나였다. 지금, 여기의 절망을 어떻게 담아내야 하고, 또 그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이 물음을 쥐고 다시 싸목싸목 걸어가 보려 한다.

김탁환
소설가, 1968년생
장편소설 『사랑과 혁명』 『거짓말이다』 『이토록 고고한 연예』, 에세이 『섬진강 일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