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인터뷰
“당신들이 살고 있는 나라가 우리가 살고 싶어 했던 나라다”

- 소설 『범도』의 주인공 홍범도 장군과의 대화

  • 가상인터뷰
  • 2023년 겨울호 (통권 90호)
“당신들이 살고 있는 나라가 우리가 살고 싶어 했던 나라다”

- 소설 『범도』의 주인공 홍범도 장군과의 대화

 

홍범도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1868년 평양에서 출생. 태어난 지 7일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9세에 아버지를 잃고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다 15세에 평양군영에 입대해 4년을 복무했다. 조지서 노동자와 신계사 객승으로 전전하다 포수로 살았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난 다음 의병대를 조직해 일본군과 싸우기 시작했다. 첫 결의동지 김수협을 잃은 뒤 단독여단이 되어 홀로 태백준령을 누비며 ‘준삼년’간 전투를 계속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2차 봉기에 나섰다. 1907년 일제의 총기 회수를 거부하는 포수들을 조직해 3차 봉기에 나서 태백준령을 누비며 연전연승했다. 1908년 삼수군 신갈파진에서 일본군을 격퇴하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갔다. 통화와 길림을 거쳐 1909년 러시아령 연해주로 가 추풍을 근거지로 삼고 두만강을 넘나들며 국내진공 작전을 펼쳤다. 만주와 연해주를 오가며 독립군의 조직과 양성, 무장투쟁을 계속했고, 1919년 3.1운동에 이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이 되어 부대를 이끌고 봉오동으로 이동,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치른 첫 전쟁의 제1회전인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어진 청산리대첩을 김좌진과 함께 승리로 장식한 다음 연해주로 이동했다.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추방되어 크질오르다의 고려극장 수위로 말년을 보내다 1943년 세상을 떠났다. 2021년 고국을 떠난 지 103년 만에 유해로 돌아와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1921년 극동피압박민족대회 당시의 홍범도(출처 : 독립기념관)

내가 항일무장투쟁 전선에 섰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기로 작정한 건 13년 전이었다. 10여 년 동안 취재, 조사하면서 장군과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부터 그가 이 소설의 주인공은 아니었다. 다른 주인공을 내세워 쓰려다 번번이 실패했다. 그를 주인공으로 최종결정하고 나서 집필에 매진한 마지막 3년 반은 매일 그와 함께 지냈다. 그가 처음 총을 잡았던 북대봉산에서부터 평양, 한양, 황해도 수안의 총영, 금강산 신계사를 거쳐 태백준령을 넘나들며 함께 일본군과 싸웠던 나날이 아득하다. 신갈파진에서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 가던 길에서 보았던 그의 눈빛이 지금도 생생하다. 며칠에 간신히 한 끼를 얻어먹으며 만주를 횡단해 연해주로 가던 그의 시간은 뒤를 따라다니는 내게도 무척 뼈아팠다. 장군과 부대원들은 물론 나도 주리고 힘들어 말을 걸 기력도 없었다.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승리를 거두고 연해주로 복귀했던 그는 중앙아시아의 크질오르다로 추방당해 고려극장 수위로 최후를 마쳤다. 돌아가기 열흘 전에 그는 극장 수위로 모은 월급을 모두 털어 흥성한 잔치를 열었다. 누구로부터 대접받아보지 못하고, 단 한 번도 배불리 먹어보지 못했던 당신의 동지와 부하들을 불러 양껏 먹이고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리고 홀연히 떠난 그가 남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재산 한 푼, 핏줄 한 점 남기지 않고 떠난 그의 이야기를 5천300장의 원고로 쓰면서 더러 지치기도 했지만 주저앉지 않고 끝까지 완주할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그가 앞서가며 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수없이 그와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 공식적인 인터뷰는 이것이 처음이다.


 방  사람들이 제게 이렇게 많이 묻습니다. 나라로부터 아무것도 덕을 본 것이 없는데, 홍범도 장군은 왜 항일무장투쟁에 뛰어들었어요?

 홍  글 좀 쓰는 줄 알았는데, 13년이나 동안 따라다니며 귀찮게 하더니 대체 뭘 쓴 거요. 『범도』를 읽고도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많다면 그걸 쓴 작가한테 문제가 아주 많은 거 아니오?

 방  아니지요. 『범도』를 읽은 사람보다는 읽지 않은 사람이 더 많단 말입니다.

 홍  읽은 사람에게야 쓴 사람이 대답할 책임이 있지만 읽지도 않은 사람의 질문에 쓴 사람이 왜 대답해야 하오? 작가는 자기가 쓴 것에 대해서만 책임진다고 당신이 내게 말하지 않았소.

 방  그러니까요. 『범도』 읽은 사람은 그런 질문 않으니까, 읽지 않은 사람에게는 장군님이 직접 대답해주셔야지요.

 홍  그게 무슨 대답할 만한 일이오. 마을에 강도가 들었는데 내 집이 아니라고 가만히 앉아 먼 산만 쳐다보오?

 방  그래도 그 강도 잡으러 다니느라고 평생을 바치진 않잖아요. 어제 어느 고등학교에 특강을 갔더니 선생님 한 분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렇게 모든 것을 헌신할 수 있느냐? 그랬더니 옆에 있던 선생님이 『범도』를 다 읽고 나서 깨달았다면서, 장군님의 순정함이 그런 삶을 살게 한 거야, 그러더라고요.

 홍  순정함은 무슨, 포수가 다 그렇게 사는 거지. 포수는 인간의 질서가 아닌 짐승의 질서 속에서 사는 자가 아니오. 여우에게는 여우의 몫이 있고, 늑대에게는 늑대의 몫이 있고, 범에게는 범의 몫이 있는 거요. 포수에게는 포수의 몫이 있고, 내게는 나의 몫이 있소. 내 몫만큼 잡고 내 몫만큼 살다가 내 몫의 명이 다하면 죽는 거요. 짐승의 밥이 되어 짐승의 질서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오. 그게 공평한 짐승의 질서라고 나를 포수로 받아준 신포수가 내게 가르쳤다고 이미 얘기해주지 않았소.

 방  『범도』는 장군이 만났던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이야기입니다. 장군이 범도의 길에서 만났던 사람 중에 가장 안타까웠던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홍  차이경, 나와는 너무 달랐소. 공부가 너무나 하고 싶어서 개화당 도련님들을 따라다니다 갑신년에 목이 달아나지 않았소. 권력 같은 것에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는데 조선 바깥의 세상이 너무 궁금하고, 다른 나라의 말과 글을 배우고 싶어 했던 것일 뿐이었는데 말이오. 나는 자주 그가 처형당하지 않고 공부를 했으면 지금쯤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그가 살아 있는 세상은 또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소.

 방  가장 미안하고 고마웠던 사람은 누구였는지요?

 홍  많지, 너무 많아. 김수협부터 시작해서 나와 함께 싸우다 먼저 간 이들이 얼마나 많아. 그들의 희생으로 나와 우리 부대는 가장 오래 싸우고 가장 크게 이길 수 있었지. 그렇지 않았으면 무슨 재주로 압도적인 병력과 무장력을 지닌 일본군에게 끝내 궤멸하지 않고 버텨냈겠소. 죽음의 계곡에서 나를 살리고 전사한 김수협이나 봉오동에서 본대가 퇴각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이화일의 희생이 없었으면 독립군은 진작에 끝났을 거요. 나를 희생해서 우리를 지킨다. 그건 단순히 우리의 ‘정신’이 아니라 우리를 지켜낸 거의 유일한 전술이었소. 영화 <봉오동전투>에서는 배우 류준열이 이화일 분대장 역을 맡아 그 정신, 그 전술을 보여주었는데 제법 그럴 듯했소.

 방  일본군의 고문으로 죽은 아내, 일본군과 교전 중에 16세 나이로 전사한 큰아들 양순이, 장군을 따라 만주와 연해주를 전전하며 싸우다 쓰러져 약 한 첩 쓰지 못하고 죽은 둘째 아들 용환이에게는 미안하지 않았는지요?

 홍  작가는 그걸 제 입으로 말을 하고 다니오?

 방  그럼 참으로 미웠던 사람은 누군지요?

 홍  이미 『범도』에 다 써두고 나서 그런 걸 왜 내게 다시 묻소.

 방  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무기를 사라고 맡긴 군자금을 착복한 박기만과 그를 비호한 문창근이 도리어 장군을 죽이려고 했단 건 썼지만 카자흐스탄의 이웃집 여자 얘기는 제가 쓰지 않았습니다. 그 행실 나쁜 여자를 꾸짖었다 되려 그 여자의 거짓 밀고로 장군이 지니고 있던 수첩과 총까지 압수당하지 않았습니까.

 홍  용서할 수 없지. 나 대신 먼저 떠난 동지들의 이름을 빼놓지 않고 적어둔 수첩을 빼앗겼고, 내 몸에서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는 총을 빼앗겼으니까.

 방  가장 알 수 없었던 사람은 누구였나요?

 홍  예전에는 연해주의 리범윤이 가장 묘한 사람이라고 여겼소. 내가 문창근의 손에 죽게 생겼을 때 끝내 죽이라고도 살리라고도 하지 않은, 참으로 그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가장 수수께끼 같은 인물은 엄인섭이었소. 안중근의 의형제였고 나의 의형제였던 그가 왜 밀정이 되었는지, 그럼에도 왜 나를 죽이지 않았는지, 그가 나를 죽이고자 했다면 기회는 아주 많았는데 말이오.

 방  기회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더 있을 것으로 여기고 미루다가 정체가 탄로 난 것이 아닐까요?

 홍  저승에서 다시 만나 물어봐도 그 이유를 말하지 않으니 여전히 알 길이 없소.

 방  만주와 연해주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때는 언제였나요?

 홍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승리한 다음이었을 거요.

 방  봉오동전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20년을 대한독립전쟁 원년으로 선포하고 난 다음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수행한 첫 전쟁의 첫 전투였습니다. 봉오동전투에 참전한 독립군은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소집한 첫 군인들이었고요. 장군은 대한민국의 첫 군인으로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수행한 첫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뒤이어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연합해 일본군을 대파한 청산리전투는 항일독립전쟁사를 빛낸 쾌거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봉오동, 청산리 전투 승리 다음이 가장 힘들었다고 하는지요.

 홍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패한 일본군이 어떻게 했소. 2만5천 명의 황군이 만주벌판을 노랗게 뒤덮지 않았소. 그때 봉오동과 청산리 일대의 주민들을 비롯해 얼마나 많은 우리 동포들이 왜놈들에게 죽어 나갔소. 무고한 동포들의 목을 작두 위에 올려놓고 잘라서 죽였소. 산 사람의 허리를 잘라 죽였고, 자식이 보는 앞에서 아비의 얼굴 가죽을 벗겨 죽였소. 동네 사람들을 교회에 몰아넣고 불을 질러 태워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소. 우리의 승리는 늘 그렇게 패배보다 고통스러웠소. 크게 이길수록 더 고통스러웠던 것이 우리의 전투였소. 그래서 만주의 동포들을 더 희생시킬 수가 없어서 러시아 땅으로 이동했던 거 아니오.

 방  러시아령으로 넘어가게 된 과정을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홍  봉오동에서 이긴 우리 부대가 청산리로 갔던 것은 동북삼성을 지배하는 장작림이 일본군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우리에게 봉오동을 떠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었소. 일본군은 장작림에게 우리를 진압할 것을 요구했고, 갈 곳이 없던 우리 독립군은 일제히 러시아령으로 갈 수밖에 없었소. 당시에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한 나라는 러시아가 유일했소.

 방  그렇게 간 곳이 자유시였던 거죠. 거기서 벌어진 것이 자유시 참변인데, 그 발단이 어떻게 된 건가요?

 홍  러시아군이 자유시에 집결한 우리 독립군의 무기를 회수하겠다고 통보해왔소. 자신의 영토에 들어와서 아무런 통제를 받지 않고 무기를 들고 활동할 수는 없다. 일단 무장을 해제하면 자신들의 법과 군사편제에 따라 우리 독립군 부대를 재편성해주고 더 좋은 무장을 제공하겠다고 했소. 물론 누구도 그 요구를 따르고 싶지 않았지만 러시아에서 러시아군과 협조해 일본과 싸워야 할 우리가 러시아군과 교전을 벌일 수는 없지 않소. 그 과정에서 일단 무기를 내주고 러시아군의 협조를 얻어 재무장하자는 쪽과 절대로 무기를 내놓지 않겠다는 쪽으로 입장이 갈렸소. 나는 러시아군과 충돌을 막고 부대원들의 보호하기 위해 무기를 내놓는 쪽을 선택했소. 그런데 러시아군과 그 러시아군에 편재되어 있던 일부 고려인부대가 무장을 내놓지 않은 우리 독립군을 무력으로 진압해버린 것이오.

 방  그게 자유시 참변으로 부르는 사건이지요. 지금 일부에서는 자유시 참변 과정에서 장군이 우리 독립군을 학살하고 진압했다고 주장하며, 육사에 있는 장군의 흉상을 철거해야 한다고 합니다.

 홍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러시아군과의 충돌도 피한 우리 부대요. 그런 우리 부대가 우리 동포, 우리 동지들에게 총질을 해? 더구나 이미 무장해제를 당하고 격리되어 있던 우리가 누구를 진압할 수 있단 말이오. 무장해제를 하지 않은 동지들이 러시아군과 교전 중에 희생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와 부대원들은 모두 땅을 치며 통곡했소. 그건 함께 있었던 철혈광복단원 최계립의 글에 잘 나와 있소. 봉오동전투에 나서는 우리 부대에 무기를 제공해주려고 나섰던 이들이 철혈광복단원들이고, 얼마 전 넷플릭스 드라마 <도적>의 배경이 된 15만원 탈취작전의 주인공들이오. 그 작전의 유일한 생존자가 최계립이었소.

 방  가슴이 아픕니다. 그런 속에서도 행복한 순간은 있었겠지요. 만주와 연해주 시절에 가장 기억에 남는 시간은 언제였는지요.

 홍  밀산에서 지내면서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는 일을 하며 소일할 때였소. 농사철이라고 학교에 보내지 않는 집에 찾아가 부모를 나무라며 아이들을 불러내 학교에 데려다주고, 다리를 다쳐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을 업어다 주던 날들, 그런 날도 내게 있었소….(미소)

 방  백무아와 만났던 짧은 순간은 행복했던 시간이 아니었다는 것인지?

 홍  그건 그럴싸하게 분칠을 해놓은 작가가 대답할 일이지 내게 물으면 되겠소.

 방  고려극장에서 수위로 있던 시절 희곡작가 태장춘이 홍장군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어 무대에 올린 것을 보지 않았습니까. 연극이 끝난 다음 배우들이 소감을 물었을 때 ‘너무 추네. 너무 추어’라고 했지요. 연극이 너무 장군을 치켜세웠다고 했는데 소설 『범도』를 본 소감은 어떠셨는지요.

 홍  영리하게 추었소. 빼앗긴 내 수첩에 적혔던 동지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아주 많이 불러 주어서 내가 다른 무엇으로 나무라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지 않았소. 어떤 역사책에서도 기록해주지 않은 그들의 이름 하나라도 더 누군가 불러준다면 나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소.

 방  2년 전에 장군의 유해를 실은 특별기가 우리 영공에 진입했을 때 대한민국 공군 전투기 6대가 출격해 영접, 호위하는 장면을 지켜보며 많은 국민이 눈물을 훔쳤습니다. 장군의 기분은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홍  노백린 장군이 떠올랐소. 봉오동전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이었던 노백린 장군이 대한민국 2년(1920년)에 발표한 군무부포고 제1호에 따라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수행한 첫 전쟁의 제1회전이었소. 대일 선전포고를 한 노백린 장군이 항일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그해 미국으로 건너가 만들었던 것이 공군독립군 비행사학교였소. 그가 JN-4D 훈련기 2대로 시작한 것이 대한민국 공군의 시작이었소. 내가 아닌 그의 유해가 상해에서 돌아올 때 이렇게 맞이해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소.

 방  요즘 대한민국 국방부가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세워진 장군님을 비롯한 항일독립전쟁 영웅 다섯 분의 흉상을 철거한다고 해서 많은 국민이 분노하고 있습니다. 장군님의 심기도 불편할 것 같습니다.

 홍  불편하긴, 아주 잘하는 일이오. 요즘 나라 살림이 좋지가 않아서 연구, 개발 예산과 예술가들의 창작지원금, 도서관의 책 구입비마저 삭감해서 연구자들과 예술가들이 비명을 지르고 아이들이 울상이라고 들었소. 왜 돈 들여서 흉상을 옮기고, 비용 들여가며 그걸 창고에 보관한단 말이오. 다 파쇄해서 고철값이라도 받아 아이들이 책이라도 몇 권 더 볼 수 있게 도서관에 주라고 하시오.

 방  언제 다시 인터뷰가 가능할지 모르는데 마지막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

 홍  지나간 사람이 무슨 말을 하오. 모든 앞물결은 뒷물결에 밀려가는 것이오. 그저 하나 이야기한다면 지금 당신들이 살고 있는 나라가 우리가 살고 싶어 했던 나라라는 것이오. 비록 우리는 살아보지 못했지만 우리가 꿈꾸었던 그 세상이 제법 근사한 것이기를 바랄 뿐이오.

방현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61년생
장편소설 『범도』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당신의 왼편』 『십년간』, 소설집 『내일을 여는 집』 『새벽출정』 『랍스터를 먹는 시간』 『세월』 『사파에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