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대 영화
시와 과학의 만남

- 카이 버드, 마틴 셔윈의 전기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

  • 원작 대 영화
  • 2023년 겨울호 (통권 90호)
시와 과학의 만남

- 카이 버드, 마틴 셔윈의 전기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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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다(Now I am become Death, destroyer of worlds).”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데 성공한 오펜하이머는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힌두교 경전을 인용해 그는 자신이 개발한 무기가 죽음이자 파괴자 역할을 하게 될 것을, 복잡한 표정으로 술회한다. 그의 그 표정은 무엇인가를 만들어낸 창조자의 기쁨이 아니라 자신의 만들어 낸 것이 파괴의 원흉이 될 것이라는 강력한 예감과 괴로움이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는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인생 중 가장 중요한 시기에 집중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적 바탕이 된 게 바로 오펜하이머의 전기이자 논픽션인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라는 드라마틱한 논픽션 전기의 제목 대신 담백하게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의 이름을 제목으로 삼았다. 미국의 프로메테우스라는 논쟁적이며 가치 평가적인 규정을 피해, 인물을 그저 따라가리라는 선언이기도 하다. 알다시피, 프로메테우스는 신에게서 불을 훔쳐 인류에게 전해준 상징적 테그니션, 기술자다. 메리 셸리가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부제로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를 선택한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프랑켄슈타인은 의학 기술과 생명 공학을 동원해 여러 신체를 조합하고 결합해, 무어라 부를 수 없는 ‘괴물’을 만들어냈다. 원작 소설 『프랑켄슈타인』엔 단 한 번도 괴물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를 만들어 낸 박사 프랑켄슈타인의 이름을 괴물의 것으로 기억한다. 진짜 괴물은 과학기술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 아니라 그걸 만들어 낸 사람인 셈이다.

영화는 오펜하이머의 유럽 유학 시절에서 시작해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의장 루이스 스트라우스의 장관 청문회 과정과 오펜하이머의 사상 검증 과정이 교차편집으로 진행된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맡은 스트라우스 장관 후보자는 원자력 위원회 의장으로서 평생 오펜하이머를 지지했다고 주장한다. 한편 자유주의자이자 철학적 탐구자였던 오펜하이머는 1930년대 지성계를 휩쓸었던 공산주의에 관심을 가졌다는 이유로 2차 세계 대전 이후 극심해져 가는 냉전체계 속에 반체제, 공산주의자, 스파이로 의심받는다. 원자폭탄 개발과 투하로 전체주의 국가에 저항한 승리의 결과를 안겨준 오펜하이머가 미국의 영웅으로 등극한 지 채 10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영화나 전기 속에 그려진 오펜하이머는 평면적 과학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단순한 과학자라기보다 “군축의 아버지”라 불릴 만큼 정치적 액티비스트였고 그로 인해 수많은 정적을 갖게 되었다. 한편 원자폭탄 개발의 수장, 맨하탄 프로젝트의 리더인 오펜하이머는 그저 정부 자문위원 정도가 아니라 전 미국인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스타이자 오피니언 리더이기도 했다. 그런 그의 ‘의견’이 미소 대결의 냉전주의와 군사력을 통한 국력의 무한 확장을 원하는 정부 의견과 갈라지기 시작하자 정부는 그의 영향력을 훼손하고 명예를 더럽히기 위한 음모를 꾸며 실행해 옮기기 시작한다. 전기의 표현대로 “1954년 오펜하이머가 견뎌야 했던 고통과 치욕은 매카시 시대엔 희귀한 일도 아니었다.” FBI는 오펜하이머를 오염시키기 위해 8천 쪽이 넘는 증거 자료를 수집했고, 뻔뻔하게 불법 도청과 미행을 일삼았다. 그 모든 자료들은 오펜하이머가 애국자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자격 심사위원회에서 자행된 질의 과정은 한마디로 그의 인격을 모독하고 살해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았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냉전 시기 자행되었던 공개적 인격 살인의 현장을 교차편집과 상상의 이미지를 통해 생생한 긴장감으로 그려낸다. 과학자로서 오펜하이머는 통솔력과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이었지만 인간으로서 그는 복잡한 내면과 모순을 가진 남자이기도 했다. 진 태트록과의 일화는 그런 점에서 오펜하이머의 내면적 복잡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10살 정도 차이가 났던, 부유하고 지적이었던 진 태트록와 오펜하이머의 사랑과 연애는 오펜하이머 생애의 가장 사적인 부분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비밀스러운 사생활마저 오펜하이머의 심판자들은 안보와 치안이라는 이유로 세상 밖으로 끌어낸다. 사생활의 오류나 부도덕만큼 개인을 망신시킬 수 있을 만한 게 없으니 말이다. 결혼 생활 중 다른 여성을 사랑한다고 해서 그게 반국가주의나 공산주의자의 증거는 될 수는 없지만 명예를 더럽히고 추문의 주인공으로 만들 순 있으니 말이다.

전기가 오펜하이머의 전 생애를 다루는 데 비해, 영화는 오펜하이머가 이론물리학자로서 전 세계의 뛰어난 물리학자들을 미국의 맨하탄 프로젝트, 뉴멕시코의 로스 앨러머스로 끌어들여 힘을 모아 원자탄을 개발하고, 그 성공의 결실을 맛보던 최고의 절정기와 음모와 오해, 모욕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견뎌내던 오펜하이머의 오욕의 시기에 집중한다. 그토록 열정적으로 원자폭탄 개발에 힘썼던 오펜하이머가 나가사키와 히로시마, 그 두 번 실전 투하 이후 왜 갑자기 태도를 바꿔 군축을 외쳤는지도 영화적 허구를 통해 나름의 대답을 찾아간다.

오펜하이머는 헨리 제임스의 단편소설 「정글 속의 야수」를 읽고 난 후, 작품에 흠뻑 빠져들었다고 한다. 타인과 나눌 수 없는 불안과 집착, 고통에 시달리는 소설 속 주인공은 언젠가 자기 내면 속에 숨어 있는 야수, 그 정글 속의 야수의 공격을 받아 죽음을 받게 될 거라며 괴로워한다. 심리학, 이론 공산주의, 산스크리트어와 같은 고대 언어, 문예 비평에도 관심을 가졌던 오펜하이머의 생애는 사진으로 남은 차갑고 단정한 외모만큼이나 매력적이며 다채롭다. 어쩌면 오펜하이머 일생의 원작은 전기인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보다 헨리 제임스의 「정글 속의 야수」가 더 적합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에 대한 오래된 불법 사찰과 변칙적 청문회, 위원회의 괴롭힘 덕분에 과학자 오펜하이머에 대한 건조한 사실 기록뿐만 아니라 복합적이며 이율배반적인, 따라서 매우 인간적인 오펜하이머의 흔적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오펜하이머의 풍요로운 입체성은 당국이 전혀 의도치 않았을 부산물이기도 하다.

미국의 영웅이었던 오펜하이머는 1967년 2월 18일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곁을 지킨 건 영욕의 세월을 함께한 아내 키티였다. 국내외의 신문들은 미국의 프로메테우스 오펜하이머의 죽음에 부고를 남겼다. 뉴욕타임즈의 부고 담당 기자 릴리엔털은 오펜하이머를 가리켜 “시와 과학을 하나로 묶은 천재”라고 표현했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오펜하이머>를 통해 그려내고 싶었던 것도 바로 이 시와 과학의 천재적 만남의 표현이었을 듯싶다. 원자폭탄이 버섯 모양의 화염을 만들어내고 잠시 완벽한 정적이 흐른 후 영화관을 진동케 하는 소음으로 가득 차게 되는, 그 절정 부분에 놀란의 숭고미가 압축된 이유이기도 하다.

강유정
강남대학교 글로벌문화학부 교수, 1975년생
저서 『타인을 앓다』 『시네마토피아』 『영화 글쓰기 강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