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후기
한국의 릴케, 독일을 방문하다

- 독역 이승우 장편소설 『한낮의 시선』

  • 번역후기
  • 2024년 여름호 (통권 92호)
한국의 릴케, 독일을 방문하다

- 독역 이승우 장편소설 『한낮의 시선』

 

“『한낮의 시선』이 이승우가 쓴 『말테의 수기』일지 모른다”는 ‘이룸’ 출판사의 서평이 비교문학 연구의 실마리가 되어, 먼저는 작가와 작품을 학문적 대상으로 만났다. 이승우 작가를 만난 것은 『말테의 수기』의 저자인, 독일 작가 릴케 덕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약 100년 전 독일의 한 작가가 한국에 소개되고 그의 작품이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오랜 시간 고립되어 있었던 한국의 문화가 세계와 만나기 시작할 무렵부터, 릴케의 작품들은 한국의 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생기를 주었다. 한국문학은 그의 영향을 받는 데에만 그치지 않았고, 이제 – 이미 릴케는 없지만 – 독일의 독자들에게 대화를 시도한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두 나라에서 비슷한 색깔을 갖는 작가와 작품을 찾아서 비교하다 보니, 문학이란 매체를 통해 더 풍성하고 다양하게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 것들을 알게 되었다.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과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문화의 차이를 초월한 문학의 주제이다. 이승우의 『한낮의 시선』은 모든 인간의 근원적 질문이자 뿌리인 아버지라는 존재를 다루고 있다. 그 대상은 ‘실재하지 않아도 존재하는 아버지’이다. ‘아버지 콤플렉스’ 혹은 ‘기독교적 세계관’으로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려운 이 심층적 부자관계는 아버지의 부재를 인식하지 못한 채 거의 30년을 살아온 한 청년의 이야기를 통해 치밀하게 조명되고 있다. 아버지를 찾는 아들과 아들을 거부하는 아버지라는 서사의 구조는 우리에게 익숙한 부자관계가 아니다. 그래서 불편하고 흥미롭다.

주인공 한명재는 폐병을 얻어 요양을 시작하면서, 예기치 않은 테마 ‘아버지의 존재’와 마주하게 된다. 아버지를 찾도록 운명지어진 아들이라는 존재, 그도 아버지를 찾아 나서지만, 그 아버지를 만난 결과는 오로지 실망과 환멸뿐이다. 이 시점에서 주인공은 ‘릴케의 탕자’를 공감한다. 성경의 비유에 나타난 사랑받는 탕자와 달리, 사랑받기를 거부했던 릴케의 탕자. 그러나 이승우의 탕자는 사랑을 받지도 못하고, 거부하지도 못한다. 아버지에게 거부당한 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를 살해하는 것뿐이다.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이 시대의 문학과는 차별된 방법으로, 관념적 심지어 종교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주인공의 내면 묘사를 통해 독자를 자극하고 위로하고 독자와 소통한다. 그 대화는 지루할 틈 없이 긴박하고 역동적이다.

이승우 작가는 1981년 등단작품인 『에리직톤의 초상』이 이전까지의 한국 문학 수준을 뛰어넘는 형이상학적 종교적 색채를 담은 명저로 평가받으며, 그 이후로도 40여 년간 꾸준히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다. 그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질문과 인간 내면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은 단지 그가 신학에 몸담았었다는 이력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그의 작품 속에 녹아있는 세계문학의 거장들은 그들이 집필했던 작품의 언어와 문화를 뛰어넘어 – 이승우의 작품을 통해 – 한국문학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 그의 작품 속에는 경계와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넘어서서 서로 소통하는 문학의 힘이 있다.

이승우 작가는 한국문학의 계보를 잇는 문학상들을 거의 다 받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오히려 한국 독자들에게는 대중적으로 덜 알려진 편이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특히 프랑스 문단에서는 이승우가 차기 ‘노벨문학상’ 후보로 꼽힐 만큼 찬사를 받고 있다. 그의 작품은 번역을 통해 그 진가가 드러나고 생명력이 풍성해진 예라고 할 수 있다.

짧지 않은 이승우의 문장을 번역하는 것은, 그 문장의 심오한 뜻을 이해하는 것만큼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그래서 더욱 공역자와의 협업이 빛을 발했다고 생각한다. 윤문 차원의 공역이 아닌, 원문을 이해할 수 있는 독일인 번역가와 공역할 수 있었던 것은 나와 이 작품에게 모두 큰 축복이었다. 이 모든 수고를 감내할만한 가치가 작품에 있었기 때문에 『한낮의 시선』은 나의 첫 문학번역이 되어 올해 독일에서 출판되었다. 완역 후 출판까지 일년 이상 지연되며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출판의 과정 또한 번역의 과정처럼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고 소통하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번역은 새로운 창조일 수도 있고, 단지 원작의 복사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문학)번역은 출발문화와 도착문화의 대화의 창구가 된다. 이런 매체를 통한 간접적 대화는 독자에게 오히려 더 넓은 해석의 공간을 허용하기에 문학적 매력이 더 크지 않을까. 독일 독자들의 반응이 기대된다.

 

※ 독역 『한낮의 시선』은 재단의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 지원을 받아 필자와 도미닉 파이제의 공동번역으로 독일 텔렘(Thelem) 출판사에서 2024년 발간되었다.

고유리
프랑크푸르트대학 동아시아학과 강사, 1984년생
역서 『한낮의 시선』(공역), 저서 『Kulturtransfer: Die Übersetzungen von Rainer Maria Rilkes Die Aufzeichnungen des Malte Laurids Brigge in Korea sowie Seung-U Lees Roman 한낮의 시선 Blick einer Mittagsze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