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순례
자유로운 영혼이 낭만을 노래하다

- 프리드리히 슐레겔 장편소설 『루친데』

  • 명작순례
  • 2024년 여름호 (통권 92호)
자유로운 영혼이 낭만을 노래하다

- 프리드리히 슐레겔 장편소설 『루친데』

 

프랑스의 왕정에 불만을 가진 평민의 대표들이 국민의회를 구성하고, 이에 동조하는 파리 시민들이 1789년 7월 14일 절대 왕정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함으로써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되었다. 국민의회는 그해 8월에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는 ‘인권 선언’을 발표했으며, 1792년에는 왕정을 공식적으로 폐지하고 프랑스 제1공화국을 출범시켰다. 프랑스는 왕정복고를 요구하며 협박하는 주변국에게 전쟁을 선포했으며, 승리한 지역에 친프랑스 공화국을 세웠다. 프로이센의 마인츠에도 1973년 3월에 마인츠 공화국이 수립되었으나 곧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였다.

이때 마인츠에는 문학과 철학, 정치에 대한 식견이 높은 재녀이자 팜 파탈인 카롤리네 뵈머가 첫 남편과 사별하고 친구의 집에 잠시 기거하고 있었다. 자유주의 사상을 갖고 있던 그녀는 공화제의 이상을 추종했다는 이유로 마인츠 선제후의 정부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으나 살길이 막막한 상태였다. 그녀는 마인츠에 들어와 있던 프랑스 사관과의 하룻밤 풋사랑으로 생긴 아기를 임신하고 있었다. 이때 독일 낭만주의의 선구자이며 유럽 최초로 낭만주의 이론을 정립하게 되는 슐레겔 형제가 그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들의 훌륭한 동료가 되어 독일의 초기 낭만주의 운동의 주요 멤버가 되었다.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

칼롤리네 슐레겔

프리드리히 슐레겔

도로테아 슐레겔

 

괴팅엔대학교에 다녔던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은 그 대학 교수의 딸인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의 지성과 문학적 재능을 사랑하게 되었으며, 지속적으로 서신교환을 하고 있었다. 동생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형의 부탁으로 마인츠에서 그녀를 만났는데 도움을 주러 갔다가 오히려 정신적인 위안을 받았으며, 자기 정신의 본질을 제대로 깨닫는 계기를 얻었다. 그녀는 프리드리히의 자유분방한 정신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격려해준 여성이었다. 아우구스트 빌헬름은 부모님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5살 연상의 미망인이자 잦은 스캔들로 세간의 평판이 좋지 않았던 그녀와 1796년 결혼하였다.

1797년 동생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예나에 자리 잡은 형을 떠나 베를린으로 가서 문학잡지의 편집장이 되었으며 이곳의 한 문학 서클에서 평생의 반려자가 되는 여인을 만났다. 그녀는 유명한 계몽주의 철학자 모제스 멘델스존의 장녀인 도로테아 파이트로 진보적인 지식과 폭넓은 교양을 지닌 신여성이었다. 프리드리히는 9년 연상의 유부녀인 그녀를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졌으며 평생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천재적인 지성인인 젊은 청년이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자 남편과 이혼하고 청혼을 받아들였다.

장래가 촉망되던 두 청년의 이러한 사랑과 결혼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일이었다. 그것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며, 자유로운 영혼은 낭만주의 정신으로 발전하였다. 프리드리히 슐레겔이 소설 『루친데』를 발표하자 사람들은 중간에 들어있는 율리우스와 루친데의 사랑을 슐레겔과 도로테아의 사랑으로 보고 젊은 문학도와 혼전 동거녀인 이혼녀와의 추잡한 관계로 소설을 이해하려고 했다. 그러나 슐레겔은 이 소설을 통해서 남녀 간의 사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통적이고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순수한 자연을 닮은 자유로운 정신임을 선언하며 당시의 위선적인 도덕에 대항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낭만주의 소설은 전통적인 소설의 형식을 파괴하는 혁명적인 수준의 형식을 담아야 한다는 자신의 이론에 맞추어 편지, 에세이, 서사, 연극적인 대화문 등으로 이루어진 파편적인 텍스트들을 배치한 실험적인 글쓰기를 선보였다.

<대산세계문학총서> 『루친데』는 첫 출간 때의 13장(章)-서문을 포함하면 14장-에 사후에 발견된 5장의 단편을 더해 구성하였다. 각 장 간의 연결고리는 매우 미약하여 독서의 순서가 무의미할 정도이다. 현대소설의 다양한 서술실험을 이미 경험한 독자라 하더라도 220여 년 전의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대단원조차 알 수 없는 이 난해한 소설을 만나면 당혹감을 감출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의사소통의 혼돈을 의도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독자도 굳이 순서에 따라 차례로 읽을 필요는 없다. 시집이나 수필집을 읽듯 순서에 무관하게 읽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다만 언어 사이와 단편 사이의 공간을 여행하며 그 이면의 의미들을 찾아볼 것을 권하고 싶다. 읽다 보면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젊은 문학도가 꿈꾸던 낭만주의의 이상을 만나는 일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이처럼 내용적인 면에서나 형식적인 면에서나 시대를 앞서 나간 급진적인 이 소설은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현대 소설의 서술전략을 선취한 귀중한 작품으로 재평가되었다. 릴케의 『말테의 수기』나 귄터 그라스의 『넙치』를 이미 읽어 본 독자라면 더욱 일독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루친데』는 재단의 외국문학 번역지원을 받아 필자의 번역으로 문학과지성사에서 대산세계문학총서 187권으로 출간되었다.

박상화
번역가, 1957년생
저서 『최신 대학 독일어』(공저) 『귄터 그라스의 소설 『넙치』에 나타나는 포스트모던적 경향』 『독일 현대 소설의 경향』(공저),
역서 『루친데』 『유다의 재판』 『꼬마 수달 박사』 『초끈의 울림』 『카오스와 카오스의 질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