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대 영화
잃어버린 죽음의 저의

- 박상연 소설 『DMZ』와 박찬욱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 원작 대 영화
  • 2024년 여름호 (통권 92호)
잃어버린 죽음의 저의

- 박상연 소설 『DMZ』와 박찬욱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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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경비구역 JSA>는 한국 영화의 새로운 중흥을 이끈 작품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분단의 실상을 2000년대 시선으로 재정립한 의의 역시 인정받는 고전이지만, 의외로 한국의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한 죽음의 의미를 사장한 사례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 영화가 분단의 실상을 오늘의 시각으로 진단하긴 하였으되 그 본질을 비껴갔기 때문이며, 공동경비구역의 실체를 고발하였으되 그 안에 감도는 긴장감을 결정적으로 제거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이유는 영화와 소설(원작) 사이의 상호 교호 작용 과정에서 침중한 문제의식이 일정 부분 희석되었기 때문이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소설을 원작으로 한 문예영화인데, 각색 과정에서 가장 논란을 남긴 지점은 총격 현장이었다.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총격 당사자인 두 남한 병사와 두 북한 병사는 시종일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상호 절대적인 신뢰를 쌓은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 사이의 총격전은 그들 네 명이 아닌 외부 인물에 의해 촉발된다. 이 인물을 제5의 인물이라고 칭할 수 있는데, 북한 체제에 대한 맹목적 충성을 고수하는 한 인민군 장교(차 상위)가 그 역할을 맡았다. 그로 인해 서로를 신뢰하고 감정적으로 의기투합했던 네 명의 병사가 느닷없는 외부인 침입에 어쩔 수 없이 총을 겨누게 되었다는 플롯이 마련될 수 있었다.

이를 지켜보는 이들은 이 상황을 접하고, 한편으로는 안타까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내심 안도할 수 있었다. 네 명의 병사들이 희희낙락하며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보는 이들은 어느새 상대를 향하던 적대감이 무너지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종의 위장된 안도감일 테지만, 긍정적 의미에서 상호 신뢰의 회복으로 받아들일 여지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원작 『DMZ』는 이 안도감과 신뢰와 희망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각색작 <공동경비구역 JSA>가 원작의 의도를 배반하고 만들어졌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일단, 소설 『DMZ』에는 제5의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아니 등장하기는 했었다. 원작에서는 병사들이 제5의 인물의 기습적인 방문을 받고 매우 놀라는 장면이 연출되기는 한다. 물론 이 첫 번째 방문은 영화에도 그대로 수용되었다.

다만 원작에는 두 번째 방문이 없다. 대신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 고조와, 오발된 총성과, 내일이면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막막한 절망감이 강도 높게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수혁의 느긋한 제대 파티 같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마지막 만남은 축하의 자리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서 불안감마저 느끼는 자리였다. 그러니 외부인의 기습적인 방문 자체가 필요 없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총격전을 벌이게 된 근원적인 계기일 것이다. 계기의 시작은 인근 휴전선에서 발생한 오발 사고였다. 그 순간 자동으로 수혁의 총이 뽑혔다. 소설과 영화 속 모 인물의 말대로, 휴전선은 총을 빨리 뽑을 필요가 없는 곳이었지만, 수혁은 반사적으로 총을 뽑아야 했다. 그리고 온전히 집어넣지 못했다.

 

내가 찌들어 있다고 표현한 이야긴 나를 포함한 공화국 인민들의 사고의 경직성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린 느낌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강요된 증오를 학습합니다. ― 북한군 중좌 리선혜의 말

 

무조건 빨갱이는 죽일 놈, 악마, 마귀, 만년필 비슷하게 생긴 독침을 가지고 다니면서 양민을 학살하는… 그 밖에 나쁜 말은 다 갖다 붙여도 되는 절대악이었어요.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강요된 증오를 학습해 왔죠. ― 남한군 중위 강상훈의 말

 

남북 모두 오래전부터 ‘강요된 증오를 학습’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공동경비구역 JSA>는 이 증오를 축소하고 말았다. 대신 제5의 인물에 의한 총격전은 우리의 안도감을 이어가도록 할 수 있었고, 어쩌면 장밋빛 미래라는 환상을 제시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통일에 대한 기대를 어그러뜨리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강요된 증오의 학습’의 문제는 조용히 지워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우리는 ‘강요된 증오의 학습’이라는 문제를 이 영화를 통해 더욱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었어야 했다. 원래 원작에 그렇게 분명하게 기재해 놓은 사실이었다고 했을 때, 그 안타까움은 더욱 크다고 해야겠다. 25년이 지난 지금도 그 아쉬움은 여전하다.

이렇게 되자, 이어지는 또 다른 죽음의 의미도 사장될 수밖에 없었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수혁은 자살한다. 자살은 사건 전모를 털어놓은 이후에 발생한다. 그래서 수혁의 자살 원인을 정우진을 살해하고 오경필에게 부상을 입히고 그 죄를 남성식에게 뒤집어씌운 남은 진술 속에서 찾곤 한다. 이것은 인과성을 동반한 설정이기에 일견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죄책감은 충분히 자살의 요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타당한 자살이라고 해도, 필연적으로 극적 의미까지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 자살의 왜곡은 원작 『DMZ』를 참고하면 더욱 분명해진다. 『DMZ』에서도 수혁은 비슷한 상황에서 자결한다. 그는 ‘진실’을 털어놓고 무모한 탈주를 시도했고, 그 탈주가 불가능함을 인식하자, 돌연 자살을 선택했다. 다만 자살이라는 결과가 같다고 해서, 죽음의 원인까지 같지는 않다.

『DMZ』에 나타난 자살의 원인을 탐색하기 위해서는, 소설 내에 설치된 몇 가지 설정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DMZ』에서 수혁은 ‘마루’라는 개를 키우고 있었다. 이 개는 불빛을 비출 때만 먹이를 먹도록 사육된 상태였는데, 그러다가 불빛 없이는 먹지 않는 돌연변이로 변하였고, 급기야는 불빛에 노출되면 인간을 향한 강렬한 야수성을 드러내는 존재가 되었다.

이 개의 변모는 이데올로기라는 이념의 불빛에 길들어져, 판단력을 상실한 인간(성)의 변화를 연상시킨다. 『DMZ』의 베르사미(소피 장) 부친 이연우는, 6.25 포로수용소에서 동생을 살해한 전력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포로수용소에서 조건 반사와 같은 기능을 했던 “미군이다”라는 정찰조의 외침에, 무의식적으로 일으킨 사건이었다.

불빛에 길들어진 개와 미군이라는 외침에 동생을 살해한 인간, 이 두 전사(前事)는 수혁의 내면 심리를 투시하기 위한 비유적 장치였다. 수혁을 비롯한 우리는, 어려서부터 북한을 적으로 인식하라는 강요된 기억을 인생 전반에 걸쳐 주입 당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인조인간 리플리컨트처럼 기억을 주입받은 경우이며, 그래서 총격 현장의 수혁처럼 조건 반사와 같은 경계심에 물들어 있는 경우였다.

그러니 <공동경비구역 JSA> 총격전의 목격은 비단 예외적 인물인 수혁에 대한 특이한 목격이 아니라, 북한을 적으로 인식하는 우리 자신에 대한 자성적 목격이어야 했다. 바로 우리가, 수혁을 포함한 동시대 한국인들이, 완전히 지워버릴 수 없었던 서로에 대한 경계심으로 인해, 무의식적인 살육을 저지른 장본인이자, 살육 현장의 증인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수혁은 우리보다 먼저 자신의 무의식적 실체를 확인하고 절망하는 인물이어야 했고, 그러한 수혁을 보고 우리도 절망할 수밖에 없어야 했다. 자연히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그 절망이, 가장 시급한 해결 과제라는 소설의 문제의식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야 했다.

그런데 <공동경비구역 JSA>는 다르다. 영화는 수혁의 자살을 보다 그럴듯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 각종 계기를 덧붙였다. 진실을 취조하라고 뻗대는 남성식을, 영화에서는 자살하도록 만들었다. 남성식의 자살은 수혁에게 진실을 토로하도록 하는 죄책감을 심어줄 것이다. 오경필이 자진해서 부상을 입고, 선물로 받은 라이터를 용서의 표시로 되돌려주면서, 수혁의 자책감은 가중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서사적 계기를 치밀하게 꾸며낸다는 점에서는, 각색의 정교함을 배가하는 요소로 이해될 수도 있다.

대신, 수혁의 선택이 담보하는 의미와 심각성은 격감될 수밖에 없다. 수혁에게서 목격해야 했던 몇십 년에 걸친 조건 반사 격 적대감을 확인할 길이 막연해졌기 때문이다. 조건 반사에 길든 개의 일화나 이연우의 가족 살해 경험이 빠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기억을 강요당한 리플리컨트 같은 트릭이 배제되어서만도 아니다. 근본적으로, 우리의 현실을 가늠하고 있는, 이중적 척도에서 일방적으로 한 부분만 강조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북한을 용인하는 척하면서도 항상 두려워한다. 현실적으로는 멀게 느끼면서도, 당위적으로는 가까이해야 한다고 말한다. 영화는 용인하는 태도와 가까이해야 한다는 믿음에 힘을 실어준다. 수혁의 자책감을 통해, 우리가 용인하지 않으면, 혹은 우리가 가까이하려는 믿음이 없으면, 이러한 불행과 비극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한 가지가 빠졌다. 왜 두려워하고 왜 멀게 느끼는지는 어느새 사라진 것이다. 그것은 오랫동안 우리에게 주어진 강요된 증오의 학습 때문이며, 조건 반사처럼 느닷없이 돌출될지 모르는 강퍅한 경계심 때문이다. 영화는 증오와 경계심을, 그만 놓치고 말았다. 이것이 <공동경비구역 JSA>의 죽음이, 그리고 수혁의 자살이, 몽상적으로 여겨지고 현실 도피적이라고 생각되는 이유이며, 그래서 지금도 아쉽게 느껴지는 까닭이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원작과 다른 작품이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남석
영화평론가, 부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973년생
저서 『한국 문예영화이야기』 『영화,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한국 영화의 미학과 경계』 『빛의 향연』 『조선의 영화제작사들』 『센이자 치히로였던 한 소녀에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