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가 보인다, 상몽

  • 2024년 여름호 (통권 92호)
묘지가 보인다, 상몽

글을 쓰면 구멍 난 양말을 하나 더 보여주는 기분.

아무리 기워도 엄지발가락에 구멍이 나는 내 양말. 그만두고 싶다.

 

묘지가 보인다

 

꿈에서 보던 공동묘지

이제 눈을 떠도 잘 보인다

 

우리 집은 묘지가 보이는 아파트

 

커피 한 잔 내려서 창가로 가면 땅 위로 드러난 봉분들

오늘은 구름이 잔뜩 꼈지만

날이 좋으면 어디까지 보일까?

 

내 이름을 새기는 이의 팔뚝과

이마에 맺힌 땀 한 방울

눈앞에 아른거린다

 

누구는 조상복합이네 e편한저세상이네 말하지만

어차피 한 번 가야 할 곳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사는 게 조금씩 좋아진다

적당히 일을 하고 쉬는 날 산책을 하고

 

가까이 가서 보니 푸근하다

아직 바람이 차서 두드리면 문을 열어줄 것 같아

 

지갑이 얇은 투숙객의 마음으로

모르는 사람들의 땅을 걷는다

 

또 왔군요 죽고 싶나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꽃 한 송이 빵 한 조각에도 인사를 해주는 아내

함께 자리에 누우면 여기가 꼭 내 무덤 같다 죽어도 좋다

 

 

 

상몽

 

복권을 샀는데

꽝이 나왔다

 

꿈에서 산 것조차 꽝이라니

운이 없구나 생각할 무렵

잠에서 깼다

 

창밖 놀이터에는 나무들이 서 있고

바람에 운세를 점치는지

오늘은 조금 흥분한 모양

 

나는 두꺼운 점퍼를 꺼내 입으며

간밤의 꿈을 떠올려 보지만

복권집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처럼

어제의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

 

미래를 알 수 있다면

하루만 먼저 다녀올 수 있다면

뒤집힌 이 양말부터 바로 신자

 

나는 미리 외운 번호로 부자가 되겠지

비밀을 털어놓을 수 없어서

 

밤마다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내일의 사고를 방관한 죄로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겠지

 

복권을 샀는데

오늘도 꽝이 나왔다

 

하나도 안 맞아

너는 미래에서 온 사람처럼 말했지만

 

하나는 맞았잖아

나는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린 것처럼

네 손을 붙잡고 있다

 

이게 꿈이 아니면 좋겠다

민구
시인
시집 『배가 산으로 간다』 『당신이 오려면 여름이 필요해』 『세모 네모 청설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