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데뷔작
일기와 소설의 차이

  • 나의 데뷔작
  • 2024년 여름호 (통권 92호)
일기와 소설의 차이

작가가 된다는 것은 ‘일기와 소설의 차이를 분명히 아는 것’이라내게 소설을 가르친 조해일 선생은 말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렇게 간단해?’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10년이 넘도록 그 뜻을 알 수 없었고, 심지어 신춘문예로 어영부영 등단을 하고 나서도 여전히 일기의 세계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일기의 세계란 무엇일까? 간단하게 말해 그것은 에고에 갇힌 세계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눈·귀·코·혀·몸의 감각으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의 수준으로 사물을 인지하고 세상을 판단한다. 사실 그것 외에 별달리 세상을 볼 다른 방법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세상에 이토록 많은 싸움과 갈등이 있는 것은 모두가 자신 눈에는 너무나 선명하게 보이고 명확하게 잡히는 진실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내가 봤어! 내가 직접 느껴 봤어!”하고 사람들은 말한다. 세상은 거짓과 진실의 투쟁이 아니다. 세상은 에고에 갇힌 진실들이 무한히 투쟁하는 곳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논쟁에서 지더라도 자신이 움켜쥔 경험적 진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단지 그 논쟁에서 자신이 직접 경험한 소중한 진실을 제대로 설명할 논리나 논거를 찾지 못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 모두 자신만의 일기의 세계에서 살고 있고 에고라는 단단한 청동 갑옷 밖으로 빠져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철학책을 읽거나 대학원 같은 곳을 다니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글쎄다. 아마 보다 교양 있고 전문적이며 우아한 척하는 주관을 얻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그것의 본질은 여전히 내가 보고 내가 판단하고 내가 결정하는 자기중심적인 일기의 세계이다. 자신을 똑똑하게 만드는 것과 일기장의 세계 밖으로 빠져나오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차원이기 때문이다.

탄트라 불교의 한 명상 기법에서는 아주 색다른 방식을 제안한다. 그것은 내가 타자를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타자 속으로 직접 들어가 타자 자체가 되는 것이다. 웃기는 말 같지만 그것은 나무가 되는 법을 배우고, 바람이 되는 법을 배우고, 하마가 되는 법을 배운다는 말과 같다. 마음은 놀라운 가소성을 가지고 있다. 마치 메소드 기법처럼 배우가 살인자 배역을 맡으면 살인자의 마음이 되고, 도둑 역할을 맡으면 도둑의 마음이 되듯이 마음은 자신의 의지와 주변의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 마음은 무한한 상상과 변형이 가능한 인간에게 주어진 아주 특별한 보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부모가 되면 부모의 마음이 되고, 판사가 되면 판사의 마음이 되며, 노숙자가 되면 노숙자의 마음이 되고, 사채업자를 피해 도망을 치면 도망자의 불안한 마음이 된다. 마음은 아주 쉽게 아이처럼 순수해졌다가, 우쭐해졌다가, 치사해졌다가 다시 우울해진다.

소설은 ‘내’가 타자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아니다. 소설가의 감정과 생각을 주인공에게 주입해 세상에 내놓는 유사 일기나 배설물이 아니다. 누가 소설가의 개인적인 생각과 감정 따위에 관심을 가지겠는가. 소설을 쓴다는 것 혹은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주인공과의 동일시를 통해 내가 다른 존재 즉 ‘타자’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살인자가 되고, 도둑이 되고, 나비가 되는 경험 그 자체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과 다른 존재가 되었을 때만 비로소 타인의 삶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05년 겨울 나는 서울의 빚쟁이들과 내가 벌인 모든 어리석은 일들과 사람들을 피해 태백산의 어느 폐교로 숨었다. 수억 원의 빚과 암울한 과거와 불투명한 미래가 내가 가진 전 재산이었다. 나는 너무나 피로했으므로 잠을 자기 시작했다. 한 열두 시간쯤 잠을 자고 일어나서 뭔가를 좀 먹고 오줌을 누고 다시 열두 시간 잠을 잤다. 그리고 일어나서 뭔가를 좀 먹고 물을 마시고 다시 열일곱 시간 잠을 잤다. 그렇게 나는 일주일 내내 잠을 잤다. 그 엄청난 잠에 빠져있는 동안 나는 문득 내가 겨울잠을 자는 곰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찬 바람이 분다. 그리고 내가 덮고 있는 이불은 마치 겨울잠을 자는 곰의 따뜻한 동굴 같았다. 그러자 나는 정말 곰이 되었다. 나는 곰이 되었으므로 계속해서, 계속해서 잠을 잘 수 있었다.

눈을 뜨고 나서 나는 난생처음으로 의식이 ‘나’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의식이 원하는 어떤 곳에라도 스며들어 갈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즉 곰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곰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처음 된 것은 3년 동안 겨울잠에 빠진 한 뚱뚱한 사내였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라나기 시작한 문방구 사장이 되었다. 나는 머리가 붙은 샴쌍둥이가 되었다가, 도플갱어가 되었다가, 몇 년씩 시간을 잃어버리는 타임스키퍼가 되기도 하고 유체이탈자가 되기도 했다. 우리가 꿈속에서 그러하듯 나는 존재하는 모든 형상 속에 잠시라도 들어갈 수 있었다. 그것이 묘하게도 어색하지 않았다. 나는 컴퓨터를 열고 내가 되어본 존재들에 대해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첫 장편소설인 『캐비닛』을 썼다. 말하자면 내 입장에서는 『캐비닛』이 그나마 일기의 세계를 살짝 넘어 소설의 세계로 들어간 첫 작품인 셈이다.

김언수
소설가, 1972년생
장편소설 『캐비닛』 『설계자들』 『뜨거운 피』, 소설집 『잽』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