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적 순간
노래의 탄생

  • 결정적 순간
  • 2024년 여름호 (통권 92호)
노래의 탄생

 3호선 버터플라이라는 밴드에 몸담았던 시기가 1999년부터 2016년, 준비하던 기간까지 더한다면 더 거슬러 올라가서 1998년부터, 햇수로 18년 정도다. 3호선 버터플라이(이하 때로 ‘3호선’이라 약칭)를 그만두던 해에 내가 만 49세였는데, 그때까지로 친다면 내 인생의 거의 4할에 해당하는 시간을 이 밴드와 함께했다. 참 긴 시간이다. 리더였던 내가 밴드를 탈퇴한 이후 한 장의 앨범이 더 나오는 것을 먼발치서 지켜봤다. 그 후 밴드는 포즈 버튼을 누른 상태다.

돌이켜 보면 위기가 참 많았다. 주관이 강한 뮤지션들이 서로의 마음과 귀를 열어 어떤 지향점을 향해 공동으로 나아간다는 게 어디 쉽겠는가. 목소리만 들어봐도 얼마나 개성이 강할지 미루어 짐작이 가는 남상아라는, 어쩌면 한국 록 역사에서 가장 특이한 보컬리스트의 한 사람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을 뮤지션이 밴드의 프론트란 말이다.

한 마디로, 3호선의 스타일로 대중성을 확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3집 (2004)을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다. 온갖 소리의 실험들이 다 집대성된 앨범이라고 자평하고 싶을 정도로 우리는 열정을 쏟았고 그 결과물로 CD가 나왔으며 그 안에 실린 소리들에 자부심을 느꼈으나, 어쩌면 당연히, 이 앨범은 몰이해 속에서 망각의 바다로 내던져져 너무 일찍 떠돌게 되었다.

그 이후 밴드에 집단 현타가 왔다. 뭔가 에너지가 점점 소진되어 가는 와중에, 때마침 밴드 결성 10주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밴드가 와해될 위기가 아닌가 싶었다. 멤버들 생각도 비슷했다. 고심 끝에, 마지막으로 되든 안 되든 앨범 하나만 내고 보자, 일종의 고별 앨범 비슷하게 음반을 발매한 후 접게 되면 접자, 뭐 이런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벼랑 끝에 선 심정이었다. 지난 앨범 이후 드문드문 작업했던 곡들을 정리하고 내가 새로 두 곡쯤을 만들어 EP로 발매하기로 했다. 그때 내가 만든 노래 중의 하나가 <깊은 밤 안개 속>이다.

어느 날 한밤중에 집에 가다가 ‘추억을 말할 때 이 밤, 이별을 말할 때 이 밤에…’ 이렇게 ‘이 밤’이라는 구절이 반복되는 처량한 멜로디가 밑도 끝도 없이 입가에 맴돌았다. 집에 오자마자 아무 마이크나 집어 들어 녹음 버튼을 누르고 거칠게 녹음하여 기억시켜 놓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 들어봤더니 괜찮았다. 음울하고 감상적인 느낌이 상아와 잘 어울릴 거 같았다. 오랫동안 다락방에 있던 첼로를 꺼냈다. 나의 첼로 실력은 정말 보잘것없었지만 몇 개의 음이 머릿속을 떠도는데 그걸 붙들어줄 악기는 첼로밖에 없었다. 더듬더듬 운지를 하며 첼로 파트를 녹음했다. 기타도 나 홀로 녹음했다. 우리 인디 밴드들은 이렇게 혼자 해결하는 일에 익숙하다. 소스들을 하드디스크에 주워 담아 베이스 치는 남윤이의 작업실로 가져갔다. 일단 곡을 더 완성했다.

그때까지 상아는 이 노래를 들어보지도 않은 상태였다. 상아는 당시 몇 달간의 프랑스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꼭 가야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상아와 녹음 일정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미루고 미루다 상아가 떠나기 바로 전날이 되었다. 내일이면 상아는 프랑스로 가서 3개월인지 그 이상인지를 머무르게 된다. 나는 직감적으로 오늘 녹음하지 않으면 3호선은 영영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딱 오늘뿐이었다. 시간이 없는 상아와 겨우 시간 약속을 했다. 때는 이미 한밤중.

상아가 남윤이의 작업실로 들어오는데, 살짝 들떠있는 표정이며 호흡이며 분위기와 공기로는 벌써 여정이 시작된 것 같았다. 내 목소리로 가이드 보컬을 녹음한 <깊은 밤 안개 속>의 데모를 들려주었다. 감정이입을 심하게 해야 하는 이런 노래는 바로 듣고 바로 기분 내기가 쉽지 않다. 여러 번 반복해서 녹음했다. 우리는 점점 지쳐 갔다. 서로가 원하는 느낌의 뭔가가 드러나지 않은 채, 속절없이 밤은 깊어만 갔다. 급기야 막막한 침묵이 흘렀다. 관건은 곡 후반부에 ‘깊은 밤 안개 속’을 반복하는 대목이었다. 똑같은 가사를 주문걸 듯 반복하면서 막막함을 끌어올려야 한다. 그 막막함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무렵 ‘사랑을 노래해 이 밤’이라는 가사가 나오면서, 바늘 끝으로 창호지를 뚫어 빛이 스미듯 미세하게 숨통을 터줘야 한다. 그 상승감이 도대체 나오질 않았지만, 이런 느낌은 상아 아니면 내기 힘들 것 같기도 했다.

상아도 이 노래를 이렇게 방치해 놓은 채 여행길에 오르고 싶지는 않았을 거다. 거의 마지막 순간이 되었다. 상아가 질끈 눈을 감는 게 보였다. 남윤이는 묵묵히 녹음 버튼을 클릭했다. 점차 무너지는 느낌. 상아가 끝내 자기를 허물어뜨리고 있었다. 가두고 있던 울타리를 빠져나온 안타까움이 처절하게 노래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목소리에 의해 노래의 몸이 빚어지는 걸 바로 앞에서 목격했다. 목소리가 노래의 뼈대에 살을 붙이기 전까지, 노래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거였다.

그렇게 노래 한 곡을 출산하더니 상아는 짧게 작별 인사를 한 뒤 작업실을 총총히 빠져나간다. 등 뒤에 대고, 나는 프랑스 말로 여행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건넨다.

“봉 브아야쥬(Bon Voyage).”

성기완
시인, 뮤지션, 사운드 아티스트, 1967년생
시집 『쇼핑 갔다 오십니까?』 『유리 이야기』 『당신의 텍스트』 『ㄹ』 『11월』 『빛과 이름』, 저서 『영화음악, 현실보다 깊은 소리』 『재즈를 찾아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