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아버지 차범석
- 나의 아버지 차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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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범석(1924~2006) : 극작가, 전남 목포 출생. 목포중학교 교사, 극단 제작극회·극단 산하 대표, 청주대학교 예술대학장, 서울예술전문대학 극작과 교수,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역임, 희곡 「산불」 「불모지」 「성난 기계」 「고구마」 「밀주」 「귀향」 「청기와집」 「열대어」 「장미의 성」 「이차돈의 죽음」 「새야 새야 파랑새야」 외 다수
기억 속에 아버지는 항상 열정적이고 바쁘게 사시며 시간도 바쁜 나를 못 쫓아온다며 호기스럽게 농담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팔십 평생을 사셨지만, 웬일인지 아버지의 얼굴은 나이테가 없었고, 소년같이 맑은 얼굴로 익살스럽게 웃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아버지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큰딸로서 지난 추억을 꺼내 보고자 합니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은 누구나 배고프고 힘든 시절이라, 연극하시는 친구나 후배들이 건수만 있으면 집에서 술자리를 벌였습니다. 그럴 때 불평 없이 맛깔스러운 안주에 술상을 차려내는 어머니의 음식솜씨를 은근히 뽐내셨고, 어머니께서는 아버지의 행복한 모습에 정성스럽게 음식을 장만하셨습니다.
대화가 무르익고 목소리들이 커질 때면 예외 없이 가무가 시작되었습니다. 대부분이 예술을 하시는 분들이라 노랫소리는 호소력과 가창력이 넘쳐나는 무대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노래는 레퍼토리가 다양했지만, 대표로 기억되는 곡은 김추자의 <님은 먼 곳에>였습니다. ‘사~랑 한다고~말할 걸 그랬지~’ 아버지의 가늘고 긴 손가락은 노래에 맞춰 현란하게 춤을 추었고, 연인을 떠나보낸 아쉬움에 울기 일보 직전의 감정표현으로 모두를 열광의 도가니에 몰아넣었습니다. 그런 절절한 사랑 노래를 팔십을 넘기신 연세에도 열정적으로 부르셨던 것은 작가의 늙지 않는 감성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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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술이란, 사람들과의 관계를 터놓고 진실을 이야기하고 싶은 작가의 작은 돌파구이자 작품 속 인물들을 창조해내는 묘약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술 한 방울은 피 한 방울’이라며 술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늦은 밤까지 약주를 드시고도, 아버지의 책상을 밝히는 스탠드는 새벽녘이 되어도 켜져 있었습니다. 서재가 따로 없기에, 옆에서 곤히 주무시는 어머니를 배려해 밤에는 항상 작은 스탠드 불빛에 의존하여 글을 쓰셨습니다. 일곱 식구가 살아가기 위해서, 연극 활동이나 희곡을 쓰는 일 이외에도 돈이 되는 잡문 청탁원고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덕분에 오래된 잡지나 신문에 실린 수필 등이 헤아릴 수도 없이 남아 있었으니 돈보다 더욱 소중한 작가의 발자취를 남길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어려운 살림에도 피나는 노력으로 공기 좋고 조용한 정릉에 집을 장만하셨습니다. 정릉 집은 널찍했지만 풀 한 포기 없는, 을씨년스런 마당에 집만 덩그러니 서 있는 쓸쓸한 집이었습니다. 나무라고는 테라스를 타고 올라간 오래된 등나무뿐이었지만, 여름에는 보라색 꽃으로 테라스를 덮어 낭만적인 그늘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휑한 마당에 기념일마다 손수 나무와 잔디를 심고 계절이 바뀌면 그때그때 피는 꽃씨를 뿌렸습니다. 한 해 한 해 해를 거듭할수록 아버지의 손길에 가꾸어진 아름다운 정원은 우리 가족의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주었습니다. 봄의 철쭉과 여름의 사루비아가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우리를 정열적으로 반겨주고, 가을에는 정원 담벼락을 따라 핀 작은 소국이 단풍 나뭇잎과 함께 운치를 더해 주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꽃과 나무를 가꾸는 일을 행복해하셨습니다. 한가한 시간에는 차를 마시며 오랫동안 생각에 잠기셨고, 여름밤에는 평상에 누워 별을 보며 계시다가 잠이 들기도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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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작품들이 많이 쓰였고 우리 5남매는 이곳에서 모두 출가하여 각자의 보금자리로 떠났습니다. 그즈음 아버지께서는 청주대학교 예술대학장 취임을 계기로 청주로 이사하셨습니다. 아버지 인생에서 정릉 집은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남아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아버지에게 호사는 이렇게 소박한 집에서 작은 행복을 누리는 것일 뿐, 과분하게 남을 의식하며 살지 않으셨습니다. 노년에는 생활면에서나 사회적인 위치로나 자리가 잡혔지만, 생활은 항상 근검절약하셨습니다. 어쩌다 작품료 등 상금이 들어오면, 본인의 욕심보다는 주변에 부족한 분들을 두루 살피며 여기저기 나누고 그동안 신세를 진 분들을 위해 쓰셨습니다.
80세를 넘기시고도 건강해 보이고 변함없이 활동하시던 분이라 100세는 문제없이 넘기시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일이란 누구도 내다볼 수 없는 일. 병마는 소리 없이 아버지의 몸 안에서 자라고 있었습니다. 위암 2기 판정은 아버지에게 그리 대수롭지 않았습니다. 컨디션도 나쁘지 않았고 암 덩어리만 도려낸다면 얼마든지 일상으로 돌아오리라 생각하셨습니다. 수술 후 회복기를 지내면서도 독감 정도 앓고 난 사람처럼 암을 이겨낸 듯 의욕적으로 생활하셨습니다. 고질적인 허리통증으로 힘들어하셨지만, 암이 뼈로 전이되어 나타나는 통증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셨습니다. 아버지의 건강은 하루하루 눈에 띄게 나빠졌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의 고향 목포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어릴 적 뛰어놀던 생가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한참을 문 앞에 서 계셨습니다. 아버지의 문학관이 세워질 바다가 훤히 보이는 언덕을 흡족한 얼굴로 바라보셨고, 영원한 안식처가 될 산소 자리를 무덤덤한 모습으로 둘러보셨습니다. 아마 많은 생각이 뇌리를 스쳤으리라 짐작됩니다. 짧은 일박이일의 여정은 아버지와의 뜻깊은 마지막 여행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 살짝 열린 방문 사이로 침대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계신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자세히 보니 커다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눈물방울은 너무 커서 이불로 떨어지는 자국이 선명하게 번졌습니다. 그리고 작고 담담한 목소리로 “이것으로 마지막이구나. 마지막이야!” 난생처음 맞이한 아버지의 눈물과 아픔이 깊게 박힌 독백은 명 연극의 한 장면처럼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아버지의 묘비에는 ‘천성이 가무와 신명을 마다하지 않으니 이 또한 나의 숙명이리라.’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글은 아버지께서 80세에 마지막으로 쓰신 장막 희곡집 『玉丹어!』 겉표지에 쓰인 글입니다. 죽는 날까지 신명을 다해 작가로 살다 가신 아버지를 기억하며 그리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