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초대석
영화는 철부지 정신으로 즐기는 위안

- 이장호 영화감독과의 대화

  • 대산초대석
  • 2024년 여름호 (통권 92호)
영화는 철부지 정신으로 즐기는 위안

- 이장호 영화감독과의 대화

 

 

 

_이장호 감독의 작품세계는 반세기 전인 1974년 <별들의 고향>부터 최근 편집 중인 다큐 영화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변화와 내면 탐구 여정을 담은 20여 편에 걸쳐 다채롭게 펼쳐진다. 그의 작품세계를 새삼 돌아보게 해준 이번 인터뷰는 한국 사회와 영화정책의 변화를 실감하게 한 특별한 만남이었다. 천수답 농사 같은 자연스러움과 어린애 같은 철부지 정신을 영화연출 경험에 녹여 전하는 이 감독과의 만남은 봄과 여름이 공존하는 4월 말, 그가 집행위원장으로 일하는 서울락스퍼국제영화제(Seoul Larkspur International Film Festival, SLIFF)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유지나(이하 유) 50주년이 된 작품 <별들의 고향>은 감독님의 데뷔작인 동시에 대표작으로 통합니다. 그런데 감독님의 과거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린 시절부터 영화를 많이 본 게 영화 검열관이었던 아버지 덕이기도 하다면서요. 역설적으로 감독님께서는 영화연출을 하면서 검열에 억압받기도 했고, 저항도 했던 것 아닌가요?

 

이장호(이하 이) 사실 데뷔할 때 어떤 비전 같은 건 없었습니다. <별들의 고향>을 만든 것도 신상옥 감독님 밑에서 8년 연출부 생활하다 보니 가능했던 것이었죠. 신 감독은 미리 콘티를 짜서 우리한테 보여주는 스타일이 아니셨어요. 문공부 출입, 지방 흥행사 미팅 등 바쁘게 지내다 촬영날짜가 되면 현장에 와서 “오늘 뭐 찍냐?”고 물어봐요. 퍼스트 감독이 설명해주면, 그제야 시나리오 보고 체크하기 시작해요. 커트 나누는 걸 거기서 하는 거죠. 저는 그런 상황에서 감독이 도대체 뭘 하는지 어깨너머로 봐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런데 배우는 굉장히 연기력 좋은 스타들만 썼거든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해보라고 그러면 배우들이 알아서 하잖아요? 그러면 카메라만 들여다보고 있다가 지시해요. 그걸 보면서 전 현장에서 즉흥적인 것을 많이 배웠어요. 예를 들면, 신영규 씨가 우는 장면을 하는데 마음에 안 들잖아요. 그러면 차라리 “웃어라!” 그래요. 근데 그걸 받아 신영규 씨가 다르게 표현하거든요. 그걸 보면서 감독님의 즉흥 연출에 많은 것을 깨달았어요.

<별들의 고향> 만들 때, 영화감독을 처음 하니까 걱정이 컸습니다. 신파성이 강한 시나리오였어요. 신성일 씨가 오더니 좀 한심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원작을 보여줬는데, “영화는 영화고 소설은 소설인데, 이러지 마” 하더군요. 스타가 신인 감독 하나 뭉개는 거 쉬울 때였거든요. 그래서 원작을 뒤에 숨겨놓고 촬영을 시작했어요. 그렇게 영화를 만들고 보니까 어떻게 “레디고!” 했는지 생각도 안 날 정도로 쩔쩔매면서 원작을 보면서 찍은 거였어요. 나중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 신상옥 감독님이 현장에 없었지만 전 조감독으로서 일만 한 거예요. 그런데 영화 다 끝난 다음에 인기도 좋고, 잘 만들었다는 소리도 들으니 어처구니가 없었죠. 그렇게 <별들의 고향>을 만들었으니 두 번째 작품 <어제 내린 비> 만들 때부터는 내 능력을 다시 한번 보여주자 그렇게 생각했어요. 근데 <어제 내린 비>에서 규격에 맞는 식의 연출을 하니까 제가 보기에도 생동감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유 <별들의 고향>은 원작소설을 각색한 작품이죠. 문학과 영화의 관계를 보면 문예영화란 분류개념이 있어요. 문학작품을 원작으로 한 것과 더불어 예술성이 높은 영화에 적용하죠. 감독님 작품에서 문학은 어떤 기능을 한다고 보시나요?

 

 이  원작이 있는 영화를 많이 연출하긴 했는데, 문예영화라는 느낌은 한 번도 갖지 못했어요. 최인호 소설 자체가 문예영화적 소설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원작 소설은 영화적 아이디어를 줬다는 생각만 하고 만들게 됐다고 할까요. 그러니까 일본 특유의 문예영화 느낌이 한국에 들어와서 <벙어리 삼룡이> 같은 작품에 적용되는데, 내 작품에선 그런 걸 전혀 못 느꼈거든요.

 

 유  감독님 작품은 새로운 영상시대, 즉 <바보선언>처럼 시대 비판적 청년영화의 상징이기도 했어요. 제가 한국영화아카데미 1기생이었던 1984년, 연출 강의 오셨을 때 학생들과 영화 현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죠. 당시 존재했던 검열에 대한 비판이라든가 <바보선언>이 보여준 시대 풍자적 정신이 우리에게 매우 강렬한 자극제로 작동했던 기억이 나요.

 

이장호 감독(오른쪽)과 유지나 교수

 

 이  그때도 얘기했을 텐데 <바보선언>은 어떤 형식을 생각하고 만든 영화가 전혀 아니었어요. 사실 그때 영화진흥정책이 참 엉터리였습니다. 그때는 흥행이 안 되어서 영화 제작 자체를 하지 않으니 한국영화 진흥을 위해 강제로 1년에 4편을 만들게 의무화하는 정책을 폈어요. 제작자로서는 의무적으로 만들어야 하니 제작비를 줄이는 게 우선이죠. 어차피 상영관에 붙이면 망하는 거, 돈이나 적게 들여야 외화수입 쿼터를 하나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요. 1년에 4편이니 3개월 내 영화를 만들어야 해요. <바보선언>은 <어둠의 자식들> 속편으로 계획된 거였거든요. 정부로선 <어둠의 자식들>이 꽤 불쾌한 작품이었나 봐요. 사전 검열을 할 때라 시나리오를 먼저 제출하는데, 이게 자꾸 반려되는 거예요. 까다롭게 이거저거 수정하라고 해서 검열받는 데만 한 달 반이 지나가 버렸어요. 3개월 중 제작 완성까지 한 달 반밖에 안 남은 거죠. 그러니까 자포자기 되더라고요. ‘아! 영화를 관두라는 얘기 같다’라고 생각하면서도 포기하면 손해배상 청구 등 굉장히 복잡해질 것 같아 제작사에 얘기 안 하고 일단 시나리오라도 통과시키려고 아주 교과서적인 시나리오를 만들었죠. 전혀 다른 내용으로 만들어진 좀 뻔뻔한 시나리오가 나왔고, 그쪽 사람들 보기에도 자꾸 반려되니 뭐 반항이라도 하나 싶었겠죠.

저로서는 스스로 도태되는 방법을 택한 거죠. 그렇게 통과된 시나리오로 흥행도 안 되고 영화 질도 형편없어서 자연 도태되면 손해배상 청구도 안 할 테고요. 그래서 의도적으로 여태까지 만들던 방법과 전혀 다른 방식, 즉 아주 역설적인 의도의 촬영을 시작했던 거예요. 제작사에서 자꾸 촬영 나가라고 독촉하니까 일단 이대 앞에서 촬영부터 시작했어요. 이대 앞 큰길에서 찍으면 학생들 모습을 많이 담을 수 있고, 그러면 뭐가 되겠지 싶어서요.

 

 유  훔쳐보기가 문제가 되지 않는 당시 사회 분위기를 떠올리게 하네요.

 

 이  공사장으로 위장하고 숨어서 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마음 놓고 엑스트라로 찍다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촬영했는데 정작 떠오르는 특별한 아이디어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아주 시시한 장면들만 찍은 거예요. 그런데 찍어나가다 보니 종종 만화 같은 아이디어가 생기기도 하더라고요. 어쨌든 어찌어찌 영화를 거의 만들고 버림받을 각오까지 했죠. 그런데 편집기사가 좀 만나자고 해서 갔더니 자기가 대충 붙여놨으니까 한번 보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한국영화로서는 좀 독특한 영화가 나오지 않을까?”라고 해요. 그래서 편집한 것을 보니 스스로 망치려고 넣은 엉뚱한 장면들이 계속되면서 ‘좀 특수한 작품이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의미를 붙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영화사인 화천공사 건물 꼭대기에서 제가 떨어져 자살하는 장면을 찍은 거예요. 영화감독이 죽은 다음에 나오는 영화라는 암시죠. 감독이 건물에서 떨어지는 것에 풍자를 넣어야겠다 싶어서 떨어지는 숏을 신문이 떨어지는 숏으로 연결한 거죠.

 

 

언론도 죽었다는 뜻에서. 거기에다 국민학교 1학년인 우리 아들 내레이션을 넣어 동화처럼 풀어나갔죠.

 

 

 유  <바보선언>을 만들 때 이야기를 듣다 보니, 영화의 풍자적인 장면들이 떠오르네요. 검열이 심했던 당시 상황이 <바보선언>에 실험 영화적인 풍자성을 가미하게 만든 셈이네요.

 

 이  검열은 있어서는 안 되는 치욕스러운 당시의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실험 영화적인 계산이라든지 그런 거는 없었어요. 영화 망쳐놓고 도망가려 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나름으로 조리 있게 맞아떨어졌고, 보충하자는 생각에 여러 아이디어와 의미를 붙여놓았던 거죠. 영화가 완성됐으니 이제 영화에 대해 감독으로서 설명해야 하는데 난감하더라고요. 영화가 이상하니까 기자들이 영화에 대해 자꾸 물어봤거든요. 당시 대학생들 몇 명이 그 영화를 보더니 학교에서 시사회를 하게 해달라고 해 그게 입소문이 난 거예요. 마침 화천공사에서 수입한 외국영화가 흥행이 잘 안 됐어요. 그래서 한국영화를 잠깐 붙이고, 그다음에 외국영화를 또 붙이려고 그랬는데, 대학생들이 막 몰려들더니 첫날부터 <바보선언>이 전회 매진이 됐어요. 영화가 그렇게 화제가 되고, 막상 인터뷰하게 됐는데 특별히 말할 것이 없잖아요. 그래서 “이거 사실 내가 만들었다기보다는 지금 정권하고 나하고 같이 합작한 거다”라는 식으로 엉뚱한 얘기를 하고 그랬던 거죠.

 

 유  감독님이 처했던 상황 속에서 최악의 경우가 최선을 만들었고, 걸림돌이 디딤돌처럼 작동했네요?

 

 이  망치려 해도 망쳐지지 않는 영화가 된 거지요. 제가 살아가는 방식도 가만히 보면 포기상태인데 그게 구원으로 이어진 경우가 많았어요. 지금 데뷔 50주년도 돌아보면 아주 철부지로 살았는데, 철부지 마인드가 정리된 영화로 나와서 감독으로서의 명예를 지키고 살았던 것 같아요.

 

 유  감독님 말씀 들어보면 반복되는 열정과 집념 같은 것이 느껴지는데, 본인의 연출 방식은 어떻다고 보시나요?

 

 

 이  저 자신을 파악해 보면, 꼼꼼함이 전혀 없어요. 책상에 앉아서 촬영 전에 계획을 세우면 일단 막막하고, 아무것도 안 떠올라요. 그러다가 ‘잠은 자야지. 내일 촬영이니까’ 하고 자고 나서 현장에 무방비 상태로 나가죠. 그런데 연기자와 스텝이 와글거리는 촬영 장소에만 가면 아이디어가 막 떠오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절로 즉흥 연출이 되죠. 그런 즉흥성으로 만드는 게 하늘이 준 대로 결과가 나오는 ‘천수답’이라는 농사법 같아요. 씨만 뿌리고 나서 내버려 두는 제 연출 방식이 천수답과 비슷하다는 거죠. 현장에서 저절로 생기는 조건을 잘 이용해서 영화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히치콕처럼 책상에 앉아서 모든 걸 계획해 현장에 가서 그걸 그대로 재현하는 그런 식은 도저히 안 되더라고요. 무방비 상태로 현장에 가니 어떻게든 현장에 있는 에너지를 이용하게 돼요.

좋은 예가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죠. 로케이션 촬영이라 스태프들과 다 같이 여관에 있었어요. 무방비 상태인 사람의 마음은 늘 걱정으로 가득 차 있어 잠을 편하게 못 자죠. 새벽에 깨어나 현장에 나가봤어요.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장면이 펼쳐졌어요. 호수 전체에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거예요. 정말 신비롭고 천국 같은 느낌이 드는데… 때마침 저쪽 멀리서 배가 하나 오는 겁니다. 울긋불긋한 깃발을 단 무당 배인데 물안개 속에서 엄청나게 묘하고 아름다운 거예요. 나중에 알고 보니, 죽은 어린애 영혼을 위로하는 무당 배라고 하던데, 신기하지요! 마침 이보희가 무당이 되는 마지막 장면이었거든요. 누가 나를 만들어주려고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막 여관에 뛰어와서 “야! 빨리 지금 촬영하지 않으면 놓친다!”고 난리를 쳤어요. 스태프들이 허둥지둥 뛰쳐 나와서 그걸 찍었는데 화면을 보고, 제가 놀랄 정도였죠. 돈이 천만금 있다 해도 저런 걸 만들겠냐고요? 정말 신기해요. 그래서 제가 늘 하늘이 돕는 천수답 연출이라고 하는 겁니다.

 

 유  감독님의 작품에선 공통적으로 구원을 찾아 방황하는 남성과 구원자로서의 여성이 등장하는데, 감독님이 그려내는 여성 인물은 구원자이지만 파란만장한 모습으로도 그려지는데요. 김지미 제작·주연의 <명자 아끼꼬 쏘냐>(1992)가 그런 경우였죠. 그 영화에서도 천수답 연출의 효과가 있었나요?

 

 이  아마 틀림없다고 보는 게, 러시아에서 촬영이 전부 기적처럼 이루어지는 겁니다. 1천여 명 정도, 엑스트라를 그렇게 많이 써보는 건 처음인데 어려운 작품이었어요. 우선 김지미 씨가 제작하니까 그 위치와 존재에 내가 무릎을 꿇고 했거든요. 김지미 배우를 영화 캐릭터랑 거의 맞게 만들어 보겠다고 시도해서 일본 분장사를 데려다 썼어요. 분장 때마다 얼굴 뒤에 테이프 붙이고 젊은 여자로 보이는 분장을 해봤지만 잘 안 되더라고요. 결국 카메라에 필터를 꼈던가 해서 좀 뿌옇게 환상적으로 만들었어요. 천수답 연출에서도 망가지려면 그렇게 망가질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유  감독님의 경우, 청춘 영화, 청년 정신의 대명사로 불리기도 했죠. 지금 청년들은 OTT 세상에서 살고 있어요. 영화관은 사라져가고 손 안의 영상 시대가 되는 요즘 변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인간이 가진 능력을 뛰어넘어서 기술적으로 해야 할 것은 천수답 방식으론 안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천수답 연출하는 사람이 철부지라야만 해요. 천수답은 철부지 정신과 조응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80살이 됐는데도 그런 정신으로 살아가는 거죠.

영상기술의 변화라고 하면, 유현목 감독님이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에 갔다 와서 한 이야기가 생각나는데요. 미래에는 영화를 극장에서 보지 않게 될 거로 예측하셨죠. 그러면서 “우리가 글로 된 신문을 보는데 미래는 전부 영상으로 볼 것이다”라고도 하셨어요. 그때는 제가 좀 건방지게 이 양반이 미국 구경 한번 하더니 엉뚱한 소리 한다고 생각했는데 세월 지나고 보니 그 예측이 신통하게 맞아요. 사실 코로나 이후 OTT 중심으로 세상이 변했단 말이에요. 생각해 보면 영화를 만드는 우리로서는 억울하기도 하고, 분통 터지기는 일이기도 하지만 방법이 없어요. 변화를 막을 방법은 없지요. 지금은 휴대전화로 보고 있는데 조금 더 있으면 집마다 아마 대형 스크린으로 된 방들이 생길 거예요. 결국은 집마다 극장이 있는 셈이 될 테니까 영화의 생명력은 계속 유지된다고 봐야겠지요.

 

 유  감독님의 영화 50년을 회고하시면서, 종합예술로서 영화의 가치에 대해 말씀 부탁드려요. 덧붙여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도요.

 

 이  삶에만 쫓기며 살다 보면 사람은 완전히 경제적인 동물이 돼요. 영화라는 건 경제적인 삶을 잘 활용하면서 쉴 수 있는 휴식 공간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길에서 어린애들을 굉장히 유심히 보는데, 부모는 경제적 동물이에요. 빨리 가야 하고, 질서를 지켜야 하고, 제대로 가야 하는 거죠. 그런데 어린애는 달라요. 막 신나서 걸으면 발걸음에 율동이 있어요. 걷는 것 하나에도 움직이고 까불고 그러거든요. 마음속에 노래나 리듬이 있어요. 그걸 보면서 ‘저게 예술이구나! 저게 문화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돼요. 그게 사람이 가진 가장 예술적인 본능이고 증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침에 일어날 때 기분 좋으면 어떤 멜로디가 떠오르곤 하는데, 그 멜로디는 어렸을 때 부르던 노래예요. 그런데 가사가 정말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가사가 뭐지 하고 찾아보니까 너무 재밌는 게… “병아리 떼 뿅뿅뿅”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뿅뿅뿅뿅” 이렇게 뿅이 4개예요. 이런 게 철부지 예술정신이 아닐까 싶어요.

 

_이장호 감독의 수차례 반복되는 철부지 정신을 통한 예술가 정신은 장 르누아르 감독의 말을 떠올리게 만든다. “많은 감독이 영화를 만들지만, 사실 평생 단 한 편 만드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장호 감독님의 영화세상은 장난기 넘치는 철부지 정신의 즉흥성이 발휘되는 영역이다. 그런 호모 루덴스적인 의미에 공명하며, 영화관을 넘어 각자의 손바닥을 비롯한 OTT 세상의 모든 스크린으로 나온 영화·영상 콘텐츠는 삶의 위안이자 도구이기도 하다는 현상을 절감한다.

유지나
영화평론가, 동국대학교 영화영상학과 교수, 1960년생
저서 『유지나의 시네 에세이-영화로 세상보기』 『영화, 나를 찾아가는 여정』(공저) 등 이장호 영화감독, 1945년생 영화 <별들의 고향> <바람 불어 좋은 날> <어둠의 자식들> <바보선언> <무릎과 무릎 사이> <어우동>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