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을 제외하고 가장 자주 만나는 사람들을 꼽으라면 아마도 시를 쓰는 학생들인 것 같다. 자신이 쓴 습작시를 열 편, 스무 편씩 들고 와서 한 시간이 넘게 마주하다 보면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가 왜 이런 작품을 쓰게 되었는지, 요즘 무슨 고민을 주로 하고 있는지, 어떤 작품은 쓰기가 너무 힘들어서 포기했다가 몇 번을 수정하여서 결국 완성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도 있다. 한 개인의 가장 내밀한 목소리를 1인칭으로 발화하는 이 장르에서 선생과 학생은 글만 놓고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관련된 창작의 배경, 한 사람의 실존적 고통, 어떻게 해도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깊은 질문들을 함께 고민하는 관계이기도 하다. 그래서 상당한 집중력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내가 하는 여러 일 중 가장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이어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지만 안타까운 것은 그가 사력을 다해 공을 들인 작품이라 해도 늘 좋은 평가를 해주지는 못한다는 점에 있다. 이 경우에 선생과 학생 모두 가장 괴롭고 힘들다. 뻔히 애쓴 것이 보이는데 칭찬을 해줄 수가 없다. 창작이라는 게 정말 특이한 구석이 있어서 정말 이해받고 싶고, 잘 쓰고 싶어서 오랜 시간을 공을 들여도 그게 온전히 성공적인 결과물로 즉각 나타나지는 않는다. 이때쯤 그가 말한다. “선생님, 이 고통스러운 일을 제가 왜 계속 하고 있을까요?”
최근 읽은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이나다 도요시, 황미숙 역, 현대지성, 2022)에는 영화나 애니메이션, 드라마를 빨리감기로 보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대화가 나오지 않는 부분이나 풍경 묘사, 또는 주인공과 관련 없는 장면은 건너뛰면서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는 것이다. 일본의 한 리서치 회사에서 2021년에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20~69세 남녀 중 빨리 감기로 영상을 시청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34.4%였다고 한다. 이 중 가장 높은 비율을 선보인 것은 20대였고, 20대 전체의 49.1%가 빨리 감기로 영상을 시청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다른 조사에서는 그 비율이 더 높아진다. 우리라고 별로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궁금한 것은 도대체 왜 그러냐는 것이다. 저자의 진단에 따르면, 우선 봐야 할 영상 작품이 너무 많은 것이 문제다. 생각해보니 나만 해도 그렇다. 넷플릭스, 웨이브, 디즈니 플러스, 티빙까지 구독하고 있는 OTT만 벌써 여러 개다. 처음에는 그 안에 가지런히 정렬된 영화나 드라마를 생각하면 두근두근 기대가 되었지만 어느 순간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이걸 언제 다 보나. 두 번째 이유는 더욱 잘 이해된다. ‘시간 가성비의 추구.’ 봐야 할 것이 넘쳐나니 사람들과의 대화에 끼고, 이 분야의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한 작품을 있는 그대로 다 감상하는 것은 시간 낭비에 가깝다. 이제 우리는 영상물을 ‘작품’이라고 부르는 대신 ‘콘텐츠’라고 부른다. 따라서 ‘콘텐츠를 소비한다’는 말도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되었다. ‘소비’는 ‘가성비’를 따져 실리적으로 해야 한다. 이왕이면 같은 시간에 여러 편을 소비할 수 있다면 가성비는 최고다.
“영상을 보는 목적이 ‘소비’라면 10초를 건너뛰든 빨리 감기로 보든 상관없”(27쪽)는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또한 ‘콘텐츠’라면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야 하고, 내 기분을 망치면 안 된다. 심지어 생각이 다르고 공감하기 어려운 타자가 등장하면 그를 이해하기 위해 큰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가성비가 좋지 않아서 역시 빨리감기로 건너뛰게 된다. 책에 소개된 여러 사례 중 놀라운 것은 빨리감기로 보면 감정이입이 덜 돼서 좋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는 점이다. 매일 쏟아지는 어마어마한 콘텐츠에 이미 지쳐 있기 때문에 “감정을 절약하기 위해 작품에 너무 깊이 빠지기를 꺼린다”(163쪽)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창작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친구에게 “ChatGPT를 적극 활용해 보렴. 네 고민을 말끔하게 해결해줄 거야!”라고 대답하면 되지 않을까? ‘시간 가성비’로만 따지자면 세상에 시를 쓰는 일만큼 무용한 일이 없을 테니까. 그런데 ‘콘텐츠 소비 경험’과 ‘시 창작 경험’에는 차이가 있다. 온 힘을 다해 노력해도 그에 걸맞은 시를 써내지 못했을 때의 괴로움은 도저히 ‘빨리감기’로 넘어가지지가 않는다는 점이다. 아무 대화가 없는 시간, 지루한 풍경의 연속, 주인공이 아니라 철저한 타자가 되어 존재하는 시간들, 슬픔이나 고통과 같은 격렬한 감정의 낭비를 견뎌야만이 창작의 온전한 기쁨을 생생하고 강렬하게 느낄 수 있다. 물론 ‘빨리감기’가 안 된다고 믿었던 저 경험마저 AI가 대신해줄 날이 곧 올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사무엘 베케트의 말을 빌려, 내가 이 친구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이 정도일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나은 실패를 계속 반복하는 일뿐이래. 나도 들은 말이야. 네가 힘들어하는 지금 이 시간들까지를 포함해서 네가 마침내 쓰게 될 그 작품까지가 전부 시야. 온전히 다 네 거야.” 그리고 우리는 또다시 약속을 잡아 새로운 작품으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