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나는 종로 1가의 관철동에 직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저녁이면 그 일대의 술집들이 내 활약 무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술을 얼마나 퍼마셨는지는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나는 술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어디 한번 해보자는 투로 하루하루를 넘기고 있는 꼴이었다. 그리하여 지금 나는 술병에 시달리며 삶의 마지막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거의 매일 누군가를 만나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는 또한 ‘거의 매일’ 문학이 화제에 오르기 일쑤였다. 20세에 신춘문예에 시로 데뷔를 했으니 내가 말하는 ‘문학’이란 시이기 마련이었다. 나는 학교는 연세대 철학과를 다녔지만, 어떻게 되어 서라벌예대를 오가며 시에 몰입하고 있었다. 잠자는 곳도 서라벌예대 학생회실이요 밥 먹는 곳도 그 동네 길음시장 밥집이었다. 그 분위기 속에서 서정주 선생님을 뵙고 박목월 선생님도 뵈었고 강의도 들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넘은 이즈음 어느 날 나는 다음과 같은 시를 쓴 것은 그래서였다.
월인(月印)화랑
서울 서촌의 보안여관 옆 ‘월인(月印)’ 화랑
서정주, 박목월 선생님
사진이 걸려 있을 줄이야
아, 옛 모습 선생님들!
나는 그 앞에 멈춰서서 바라보았다
서정주 선생님의 ‘서역 삼만리’며
박목월 선생님의 ‘나그네’며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저 정겨운 몸짓들은 어떠한가
내 젊은날도 뒤쪽 어디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눈물 아롱거리던 ‘서역’의 ‘나그네’ 되어
새의 조장(鳥葬)을 바라보던 어느 날
그 어느 순간 내 살은 저며지며
나는 무작정 어디론가 떠나지 않았던가
‘월인’은 ‘천강(千江)’에 내려와 무늬 지고
나는 사랑을 말하고 있었다
그 풍경이 지금 서촌에 있는 것이다
아, 선생님들의 모습!
그리고 젊은 동료들 마종하, 김형영 등과 늘 어울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인 친구들은 어느새 저세상으로 가버렸으니 이게 또 어찌 된 노릇이란 말인가.
관철동의 어느 날, 나는 그 무렵 어울리던 김문수 소설가와 저녁 술집에 들러갔다. 「이단부흥(異端復興)」 같은 좀 다른 소설을 쓰며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받은 문수형은 신구문화사의 편집을 주관하던 신동문 시인을 비롯하여 여러 문인들과 어울리고 있었는데, 신구문화사는 세계 여러 나라와 지역의 『세계전후문학전집』을 펴내어 ‘서울의 지가를 올리던’ 출판사였다. 그 술집에서 문수형과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일본 소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다가 기쿠치 간(菊池寬)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었다. 그러자 나이든 주모가 있다가 끼어드는 것이었다. “늬들이 기쿠치 간을 알아?” 그로부터 그 술집은 단골이 되었다.
관철동에서 길을 건너 신구문화사 쪽으로 간다. 그 피맛골 길에 지금은 이름도 잊은 나지막한 술집이 있었다. 비 내리는 어느 날 그리로 가다가 유리문 속에서 정공채 시인이 혼자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과 마주쳤다. “어, 선배님!” 나는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는 나보다 꽤 선배가 되었다. 학원 문단 시절부터 날리는 문사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시인이 아니던가. 그로부터 우리는 반갑게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이야기하는 관계가 되었다. 진주 출신으로 「미8군의 차」(장시)라는 시로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 무렵은 가난한 시인들이 시집도 내기 어려웠던지라 오랜만에 나온 정공채 선배의 첫 시집 제목은 『정공채 시집 있습니까』였다.
문수형은 또한 이병주 소설가도 내게 소개해주었다. 그도 또한 진주 출신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출판사에 다니던 나는 어쩌다 일 때문에 이병주 소설가를 만나는 일을 맡았는데 선생은 ‘낭만’이라는 술집에 앉아 내게 말했다. “모레까지 소설 200매를 써야 해.” 그러면서도 언제 일어날지를 알 수 없었다. 선생의 늦은 데뷔작 『소설·알렉산드리아』에 매료되어 있던 나는 그저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제목의 앞에 붙인 ‘소설’이라는 것까지가 소설의 제목이었으니…내가 아직 소설을 쓰기 전의 일이었다. ‘낭만’은 다른 곳에도 있었지만, 관철동의 그 ‘낭만’은 조병화, 정한모, 정한숙 선생 등 ‘주막 동인’들의 아지트이기도 했다. 나도 맥주 몇 잔을 얻어 마신 추억이 아련하다.
그런 어느 날, 여전히 일 때문에 선생의 집까지 찾아갔던 나는 뜰에 뛰놀고 있던 여러 어린이를 보게 되었다. 그러자 선생은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애가 많아서 많이 써야 돼.” 이 말의 뜻을 나는 아직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런데, 그런데, 앞에 거론된 모든 사람들이 이제는 여기에 없을 뿐이니, 아, 인생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