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풍경
기본에 철저한 ‘제대로 된 기자’ 만들기

- 사쓰마와리 <하>

  • 근대의 풍경
  • 2024년 여름호 (통권 92호)
기본에 철저한 ‘제대로 된 기자’ 만들기

- 사쓰마와리 <하>

《대산문화》 봄호에 쓴 ‘사쓰마와리(察回り)’ 상편에서 이 말의 뜻과 운영제도에 관해 이야기했다. 이번엔 사쓰마와리들의 취재 행태를 에피소드 위주로 소개하려 한다.

사쓰마와리들의 본령은 사건 취재다. 출입을 맡은 경찰서를 중심으로 관할 지역에서 벌어진 사건 사고를 보도하는 게 주 임무다. 시대 변화를 알려주는 새로운 사회현상이나 유행, 우리 사회의 문제점, 화제를 발굴하는 기획기사도 중요하다. 요컨대 사쓰마와리는 사람 기사, 사람들이 사는 사회를 취재하고 보도하는 기자다. 그 과정에서 취재원과 애환을 함께하며 기자로서, 인간으로서 성장해간다.

큰 사건이 일어나면 경찰은 그 관할 지역, 이른바 나와바리(縄張り) 파출소에 수사본부를 차린다. 기자들도 하리코미(張込み)를 시작한다. 집에 안 들어가고 밤낮으로 경찰을 취재하는 것은 주로 사쓰마와리 막내, 수습기자의 몫이다.

밤에 형사들 사이에 끼어서 잔 기자도 있다. 나의 선배 한 분은 귀찮을 정도로 열심히 형사를 따라다녔다. 형사가 “범인을 잡으면 제일 먼저 알려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미덥지 않아 서로 발목에 노끈을 묶고 잤다. 너무 고단해 곯아떨어졌는데 다음 날 눈 떠보니 노끈만 남아 있고, 사건은 이미 다 해결돼 있었다.

 

형사 사칭 취재, 사진 쟁탈전 등 예사로

수사 중인 경찰은 보안에 무척 신경을 쓴다. 어느 한 매체에만 특종 보도가 나가면 골이 아프기 때문이다. 경찰이 문을 잠그고 수사회의를 하는 동안 벽에 귀를 대고 엿듣던 방송기자가 있었다. 어떤 남자가 여관에서 변시체로 발견된 사건인데, 기자가 들으니 “복상사, 복상사”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경찰이 복 상사라는 군인을 범인으로 보고 수사 중이라고 ‘특종’ 방송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군인이 아니라 남자가 여자의 배 위에서 죽은 복상사(腹上死)였다.

지금은 이런 밀착 접근은 어림도 없으며 경찰이 묵인하지도 않지만, 1970~80년대에는 현장 훼손이라는 개념도 없이 기자들이 여기저기 헤집고 다녔다. 1980년 10월에 발생한 부동산 거부 조순금 씨 피살사건의 경우 지금도 미제 상태인데, 기자들이 장충동 조 씨 집을 무시로 드나들었다. 지붕에 올라가 경찰이 보지 못한 ‘범인’의 발자국을 발견했다고 보도한 기자도 있었다.

 

'박상은 양 피살사건’ 기사(1981.9)

시신 부검현장에도 들어갔다. 1981년 9월의 ‘상경 여대생 박상은 양 피살사건’ 당시 나는 형사계장과 함께 부검을 지켜보면서 ‘여성의 몸이 이렇게 큰가?’ 하고 놀랐다. 그리고 무슨 뚜껑을 벗기듯 칼로 머리를 썰어내는 광경에 충격을 받았다. 한동안 밥맛이 없을 정도였다. 당시 경찰은 유력한 용의자로부터 자백을 받았지만, 법원은 증거 능력이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경찰 수사에 큰 분수령이 된 이 사건은 ‘한국 현대사를 뒤흔든 40가지 사건’(책 제목) 중 하나다.

기자들은 사칭을 곧잘 했다. 검찰 수사관이나 형사라고 속이고 전화를 걸면 거의 그대로 믿어주었다. 무단 주거침입, 절도, 협박 범죄로 몰릴 만한 일을 거리낌 없이 하면서 취재하는 게 다반사였다.

타살이건 자살이건 인명 살상 사건과 사고가 나면 얼굴 사진을 구해야 한다. 죽은 사람 사진을 많이 실은 신문이 이긴 신문이다(그게 뭐라고 그렇게 악착같이 사진을 냈는지). 큰 사건이 나면 집에 들어가 앨범을 통째로 가져오곤 했다. 확보한 사진이 아까워 ‘카빈 2인조’ 같은 강도범 시리즈를 한 경우도 있다.

1) 투신자살한 여성이 있었다. B기자는 사진을 구하려고 그 여성이 졸업한 모 여대의 해당 학과에 찾아갔다. 조교에게 “요즘 남대문 일대에서 어떤 여자가 XXX씨를 사칭하고 다닌다. 진짜인지 사진을 보면 알 수 있으니 학과 앨범 좀 보여달라”고 하고는 조교가 한눈파는 사이 미리 준비한 면도칼로 사진을 오려 갖고 와서 신문에 냈다.

2) 어느 사건의 피살자 집에 기자들이 잔뜩 몰려들었다. 가족들은 취재에 일절 응하지 않았다. 생각다 못한 Y기자는 그 집에 전화를 걸었다. “안기부 ◯과장입니다. 지금 기자들이 개떼처럼 모여있지요? 기자들에게 사진 주면 큰일 납니다. 우리 아무개를 보낼 테니 이 사람에게 주세요.” 그러고는 다른 언론사 기자들에게 얼굴이 팔리지 않은 운전기사를 심부름 보내 사진 특종을 했다.

3) K기자는 얼굴 사진을 구하고는 대학 동창인 경쟁사 기자를 약 올리며 자랑을 했다. 그 기자는 잠깐 좀 보여달라고 하더니 사진을 들고 냅다 튀었다. 대낮에 추격전이 벌어졌는데, 상대 회사에까지 쫓아가 아무개 나오라고 소리 질렀지만 허사였다. 그래서 낙종. 박살이 났다.

 

사쓰마와리들은 칭찬을 받으며 크고 욕을 먹으며 자란다. 체계적으로 일을 배우기는 고사하고, 사쓰마와리의 우두머리인 시경캡에게 깨지지 않으면 다행이다. 시경캡은 차장도 아닌 경우가 많았지만, 실제로는 사회부의 부부장쯤 된다. 야전군 같은 별도 조직의 팀장이기 때문이다. 나보다 선배인 시경캡 중에서는 후배에게 폭언하는 것은 물론 조인트를 까거나 화장실로 끌고 가 무릎을 꿇리며 혼낸 경우도 있었다.

기자들은 선배들의 실수를 보면서 배운다. 한국일보 사회부에는 우스꽝스럽거나 잘못된 초고를 적발해 수록한 ‘영구보존하세’ 스크랩북이 있었다. 입건된 ‘명작’은 이런 것들이었다. (≪관훈저널≫ 2023 겨울호에 쓴 ‘언론 반세기 미니회고’와 일부 중복됨.)

1) 해사 순항분대를 따라 전 세계를 돌던 기자가 적도에 이르러 보내온 기사: “여기는 적도. 사방 어디에도 빨간 줄은 없다.”

2) 연일 사건 사고와 화재만 취재하던 기자의 대학 총학장회의 기사: “이날 회의는 2시간 만에 꺼졌다.”

3) 가장 압권이었던 기사: “벙어리 김모 씨가 생활고와 신병을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 씨는 평소에 죽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기사를 받아본 시경캡 왈, “뭐어, 벙어리가 말을 했어? 인마, 그러면 그게 기사지 자살한 게 뉴스냐?”

술자리도 기자 교육현장이다. 당번인 날엔 취재 야근을 하고 아닌 날은 술 야근을 하는 식인데, 술자리는 ‘즐거운 고역’이었다. 기자들은 1982년 무렵부터 폭탄주를 만들어 양껏 마셨다(그때는 양주+맥주). 맥주를 재떨이든 뭐든 옴팡한 것에 따라 마시고, 심지어 구두에 부어서 돌려 마시기도 했다. 그런 자리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면 “야, 그거 기사 아니야? 기사 안 쓰고 말로 하는 거야?”라는 핀잔과 함께 취재 지시가 떨어지곤 했다.

기자에게 모욕적인 말은 “요즘 기자 하냐?”다. 취재활동이 부실하면 듣게 되는 말인데, 더 심하면 “너도 기자냐?”가 나온다. “기사만 안 쓰면 기자도 할 만한데”라는 어느 지방 주재기자의 명언이 회자되기도 했다. 결국 술자리도 업무의 연속이었고, 선배들은 그런 곳에서도 후배들을 ‘훈육’했다. “사쓰마와리 선배는 인생 선배다.”, “기사는 120을 취재해서 80만 쓰는 거다.”, “절대 한쪽 말만 듣고 기사 쓰지 마라.”, “확인, 또 확인!”, “네가 지나간 자리에 기사가 없게 해라.”…

 

1980년대 어느 해의 마지막 날 한국일보 편집국.
냉주(데우지 않고 마 시는 정종)파티로 다들 흥이 올랐다

“압축해서 자세하게 써라”라는 말도 자주 들었다. 온라인으로 작업하는 지금과 달리 육필로 기사를 쓰던 시대에는 마감시간과 분량을 철저히 지켜야 했다. 요즘처럼 수시로 기사를 수정해 다시 내고 분량에도 절대적 제한이 없는 상황이 아니다. 제법 긴 다치기리(立切)나 박스 등 기명 기사는 데스크가 오케이할 때까지 주변에 앉아 이것저것 질문에 답하는 ‘재판’을 받아야 했다. 카톡이나 메일로 기사를 보내놓고 데스크가 보는 동안 다른 일을 하는 기자들에겐 아주 낯선 풍경일 것이다.

 

 

철저한 수련이 미흡해 보이는 요즘 언론

요즘 기자들이 2등으로 올라선 걸 등극했다고 쓰고, 유명세(有名稅)와 지명도를 구분하지 못하는 건 우리말과 한자를 모르는 탓이다. 전화로 기사를 부르던 시대에는 김지미 지(芝), 오징어 윤(允), 탱크 설(卨), 이런 말을 흔히 했다. 피의자를 취재할 때는 형사처럼 윽박질렀는데, 김재열이라는 사람이 한자를 제대로 대지 못하면 기자들끼리 ‘있을 재(在), 매울 렬(烈)’, 이렇게 쓰기로 당고(談合, 요새 쓰는 말로 짬짜미)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독립이든 동립이든 대충 ‘동닙’이라고 발음만 하면 되는 방송기자와 달리 신문기자는 꼭 한자를 확인해야 했다. 이런 점이 ‘방송기자도 기자냐’ 하는 생각까지 하게 했다.

이제는 특종도 힘들지만 낙종하기도 어려운 세상이다. 올해 50년 된 낡은 기자가 보기에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기자들이 만지면 바스러질 듯 불면 날아갈 듯 엉성하고 가볍게 쓴 기사가 정말 많다. 우리말과 한자를 잘 모르는 부실한 기사, 이념과 진영논리에 치우친 편파나 왜곡보도, 선정적 낚시 제목과 기사가 어지럽다. 선배들의 지적과 잔소리는 갑질이나 인권침해로 몰리기 십상이다.

사쓰마와리의 취재 행태에는 문제점이 많았다. 잊혀가는 근대의 풍경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기본에 충실하고 취재대상에 밀착해 철저히 확인하면서 객관과 공정을 지향하는 자세는 언제까지나 전승되고 구현돼야 할 언론 자산이다.

임철순
데일리임팩트 주필,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1953년생.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필 역임.
저서 『조선의 맹자 언론가 이율곡』 『손들지 않는 기자들』 『효자손으로도 때리지 말라』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