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의 문학
시의 봄, 봄의 시

  • 이 계절의 문학
  • 2024년 여름호 (통권 92호)
시의 봄, 봄의 시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일이다. 2024년 봄이라는 계절의 한국 문학을 ‘시’라고 이름 짓는 것은. 우선 한국의 현대 시를 대표하는 출판사 창비와 문학과지성사가 3월과 4월 나란히 500호와 600호를 냈다. 이보다 앞선 2월에는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도 50호를 맞았다. 켜켜이 쌓인 시집의 숫자만큼 한국 시의 심지는 두꺼워졌다. 김혜순 시인의 시집 『날개 환상통』의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NBCC) 수상은 이런 한국 시력(詩歷)에 근거했다.

시 부문 유일한 번역 시집으로 최종 후보에 오른 ‘날개 환상통’이 최종 NBCC 수상작이 되리라고 예감한 이들은 많지 않았다. NBCC는 미국 평론가들이 미국에서 영어로 쓰인 ‘최고의 책’을 시·소설·논픽션·전기·자서전·비평 등 6개 부문에서 가려내는 상이다. 해외 번역서만을 대상으로 한 상이 아닌 만큼 한국 번역 시집의 수상 가능성은 작아 보였다. 시인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시상식에 불참한 김혜순 시인은 『날개 환상통』의 출판사 문학과지성사를 통해 “전혀 수상을 기대하지 못했다. NBCC에 시 부문이 생기고 번역본 수상이 최초라고 한다. 아시아 여자에게 상을 준 것이 놀랍고 기쁘다”며 “훌륭한 번역으로 오래 함께해온 최돈미 씨에게 감사하다”는 짧은 소감을 남겼다. 시인의 말처럼 이는 한국 최초일 뿐 아니라 본래 영어로 쓰인 시집이 아닌, 번역 시집의 수상으로도 첫 기록이었다.

 

이미 지난 10년간 가장 많이 해외에 소개됐고 또 상을 탄 김혜순 시인이다. 그를 향한 세계적 관심은 그의 『날개 환상통』이 속한 문학과지성사의 문학과지성 시인선을 언급하지 않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또 문학과지성 시인선(1978~)에 대해 말하려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시작한 창비시선(1975~)과 민음사의 오늘의 시인 총서(1974)라는 시집 시리즈도 언급해야 한다. 이들 시리즈는 시집을 상업적으로 출판하고 판매하는 시집 대중 출판의 시대를 열었다. 어느덧 반세기가 흘러 당시만 해도 혁신이었던 시집 시리즈 기획은 오늘날 한국에서 일반적인 출판 형태로 자리 잡았다.

 

 창비시선보다 3년 늦은 1978년 출발했으나 600호라는 과업에 올해 4월 먼저 닿은 것은 문학과지성 시인선이다. 창비는 이보다 일주일 이른 3월 마지막 주에 500호라는 기록을 썼다. 신경림 시인의 『농무』를 1호로 펴낸 이래 거의 반세기만의 일이다. 창비와 문학과지성사의 각각 500호와 600호 시집 출간은 사실 한국 문학계뿐 아니라 세계 문학계에서도 뚜렷한 족적이다. 김사인 시인은 창비시선 500호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이런 (시리즈) 형태의 시집 출판이 대중의 호응을 얻으며 500권까지 이어지는 나라는 한국이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2018년 첫발을 뗀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은 2월 구현우 시인의 『버리기 전에 잃어버리는』으로 50호의 고지를 달성했다. 후발 주자인 문학동네 시인선도 지난해 가을 200호를 넘어섰다.

기념호의 발간으로 그간 인기를 끌었던 시집도 재조명됐다. 창비시선은 지금까지 총 59쇄를 찍은 정호승 시인의 『슬픔이 기쁨에게』(1979)와 50만 부 이상이 팔린 최영미 시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1994)가 대표적이다. 문학과지성 시인선에는 94쇄의 기형도 시인의 『입 속의 검은 잎』(1989), 각각 67쇄와 57쇄의 황지우 시인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와 최승자 시인의 『이 시대의 사랑』(1981) 등이 있다.

 

 

 

한국 시의 경사가 이어지면서 서점가에서 시집의 판매량도 뛰었다. 『날개 환상통』은 수상 소식에 서점들의 주문이 이어지면서 급히 5,000부를 추가 제작했다. 창비시선 500호 기념 시선집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과 특별 시선집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 문학과지성 시인선 600호 『시는 나를 끌고 당신에게로 간다』도 베스트셀러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미국, 일본 등 각국의 시인들이 “한국의 시집 시리즈와 출판 부수에 대해 황홀”해할 정도라고 김사인 시인은 말했다. 시집으로만 수십 쇄를 찍고, 초판을 수천 부 찍는 사례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드물다는 이야기다.

올해 봄은 이장욱·박연준·장석주·이병률 등 독자가 손꼽아 기다리던 시인들의 시집이 나온 계절이기도 하다. 박은정 시인의 1인 출판사 타이피스트가 대형 문학 출판사 위주의 시리즈 시집이 대세인 시 문학계에 ‘새로운 시선’을 던지는 새로운 시인선을 내놨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렸다. 한국을, 그리고 올해의 봄을 시의 계절로 만든 건 분명 시집 시리즈를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내놓은 출판사의 공로다. 그러나 이는 시를 쓰는 시인과 또 시 읽기를 포기하지 않은 독자들에 있기에 가능했다. 오늘날 한국 시에 대한 공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따지는 건 사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질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가 시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은, 미래를 향해 시가 건네는 희망의 증언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음을 증거하며, 여전히 인간에 대한 믿음이 포기되지 않고 있음을 증언합니다”(강동호 문학평론가)라는 문학과지성 시인선 600호 뒤표지 글을 곱씹어본다. ‘시는 나를 끌고 당신에게로’ 가기에 우리는 언젠가는 시와 마주할 것이다. 꼭 올해의 봄이 아니더라도.

전혼잎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 1989년생
저서 『가장 보통의 차별』 『중간착취의 지옥도』(공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