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게구름, 망우삼림

  • 2024년 여름호 (통권 92호)
뭉게구름, 망우삼림

삶과 죽음. 비애들. 환원 불가능한 수수께끼들은 삶을 연장하고 죽음을 지연시키지만, 반대도 가능하다. 무엇인가를 쓴다는 것. 이 끝나지 않을 여정의 유령선을 나는 한순간이라도 정박시키고 싶다.

 

뭉게구름

 

마을은 불타고 있었다. 양의 마을이었다. 붉은 불길이 흰 불길로 번져갔다. 세상의 모든 양이 불타서 재가 되었다. 폭설의 한밤이었다. 눈 속에 스며든 흰 재가 양 떼처럼 뭉쳤다. 이제 양들은 더 이상 울지 않는다. 울음은 양털처럼 뭉쳤다. 마스크를 쓴 방화범은 커다란 가방에 울음을 담았다. 양의 마을은 울음이 없는 소각장이 되었다. 흰 불의 점화점은 몇 도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마을에서 죽은 가장 큰 양은 가장 높은 산의 꼭대기에서 모든 현상을 지켜보고 있었다. 뭉게구름은 불길함의 징조이다. 큰 양은 큰 뿔로 심장에 걸쳐 있는 구름 떼를 걷어내며 중얼거렸다. 멸망은 아름다운 자연의 얼굴. 이렇게 희고 몽글몽글한 것이 우리를 아름답게 한다. 방화범의 가방에는 아름다움이 뭉쳐져 있다. 그는 가장 어렵고 신기한 것을 훔쳤다. 공중에 흰 뿔로 방화범을 새기다 말고 큰 양은 자신의 등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두껍고 뜨거운 등을 꿰뚫고 지나가는 흰 시체. 멸망은 의미가 제거된 아름다운 자연의 주검. 살아 있는 것은 소각장으로 가야 한다. 큰 양의 뜨거운 등에서 피가 흐르지 않았고 큰 양은 흰 시체의 공격이 사실인지 아닌지 헛갈렸다. 멸망은 이곳에서 시작된다. 사람 사는 동네 맞아? 나는 가난한 동네는 가지 않아! 도둑이자 방화범은 가방 모서리를 주물럭거리며 크게 외쳤고 침을 흘렸다. 시체에서 침이 흐르다니. 그는 자신의 몸을 만져보았다. 몸 안팎으로 뭉게구름이 떠 있었다. 양의 웃음이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울음만을 훔칠 수 있었다. 폭설의 한밤이었다. 가장 높은 산꼭대기는 추락하기 가장 좋은 절벽이지. 꼭대기로 기어 올라가 흰 불을 지르고 큰 양의 울음을 훔친 도둑 방화범은 주머니에서 흘러나오는 멸망의 몽글거림이 새로운 축산업이 될 거라 확신했다. 타지 않는 몽글 고기. 영원히 구울 수 있다. 소각장은 전설의 양 마을. 울음이 도륙된 주검의 마을. 그는 울렁거리는 속을 다스리려 울음 하나를 몰래 꺼내 소화제로 먹었다. 가방을 끌어안고 공중을 둥둥 떠다니던 그가 흰 내장을 토해내자 몽글몽글 흰 김이 피어올랐는데 허리가 꺾인 채 추락하던 가장 큰 양은 이것이 멸망인지 아닌지 헛갈렸다.

 

망우삼림


내가 잃어버린 모든 것이 이곳으로 밀려온다고 여긴다. 안녕. 상실된 조각이 이곳에서 쌓여서 커다란 네가 되겠지. 타이완에는 죽은 삼나무 숲이 있대. 죽은 나무들이 꺾이지도 않고 서서 죽어 있대. 죽은 이후에 명소가 되어 산 자들이 떠돈대. 안녕. 강줄기를 막아버리니 네가 보여. 녹슨 철책에서 밀려온 안개들. 부서진 시멘트. 재떨이. 약봉지. 깊은 냄새가 있어. 추워서 덜덜 떨고 있던 네가. 산 자들을 끌어안고 물이 되어버린 너의 호흡이. 너는 그때 왜 그런 편지를 보냈니. 잘 지내고 있다고, 쿠키를 구웠으니 가져다주겠다고. 내 주소를 적어둔 봉투를 심연으로 떨어뜨리고. 내가 잃어버린 모든 것이 그곳으로 밀려간다고 여긴다. 커다란 유령의 숲. 나는 답장 쓰는 것을 좋아해. 너의 입김이 수많은 나무 사이에서 흘러나올 때 아무도 받지 않을 답장을 썼어. 너는 이미 내가 잃어버린 모든 답장을 받았어. 삼나무 등걸 사이로 비에 젖은 유령 날개가 붙어 있고 몸통만 바닥에 굴러떨어져 내밀한 흙의 얼굴이 되어 가는 곳. 내부란 무엇일까. 안녕. 네가 있는 삼나무 숲에서 나는 새 영혼의 병을 얻었어. 죽은 영혼은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을까? 나를 끌어안고 있는 커다란 너의 날개는.

이영주
시인
시집 『108번째 사내』 『언니에게』 『차가운 사탕들』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여름만 있는 계절에 네가 왔다』
『그 여자 이름이 나하고 같아』 『좋은 말만 하기 운동 본부』, 산문집 『백 일의 밤 백 편의 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