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화제작
텍스트로서의 남성, 비평가로서의 여성

- 양귀자 장편소설 『모순』

  • 오늘의 화제작
  • 2024년 여름호 (통권 92호)
텍스트로서의 남성, 비평가로서의 여성

- 양귀자 장편소설 『모순』

  

 

『모순』은 1998년 살림출판사에서 출간된 양귀자의 세 번째 장편소설이다. 당시 이 소설이 독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으며 베스트셀러에 오른 까닭에 관해 혹자는 IMF라는 거대한 금융 위기로 인해 한국 사회에 만연했던 불안한 감각과 연결한다. 그러나 첫 출간으로부터 26년이 지난 2024년 현재까지도 이 소설이 증쇄를 꾸준히 이어나가며 여전히 독자들의 손길에 닿고 있다는 사실은 『모순』에 시대적인 상황을 뛰어넘는 특별함이 있음을, 혹은 동시대 한국 사회의 문제의식을 관통하는 날카로움이 있음을 짐작게 한다.

양귀자는 한국의 소시민들을 섬세하고 따뜻한 필치로 그려낸 연작소설집 『원미동 사람들』(1985-1987)을 통해 1980년대에 이미 뛰어난 문학으로 평단과 독자들의 너른 지지를 받았고, 이후 남배우를 납치, 감금, 조종하는 젊은 여성 강민주의 파격적인 행보를 그려낸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1992)을 통해 사랑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젊은 여성의 복잡한 욕망과 갈등을 중심으로 또 한 번 작품 세계를 갱신한 바 있다. 그 이후에도 전생-환생이라는 고전소설의 모티프를 차용한 『천년의 사랑』(1995)도 양귀자의 작품 세계가 얼마나 폭넓고 다양한지 보여주었지만, 『모순』은 결혼 제도 언저리에 있는 젊은 여성의 욕망과 갈등을 섬세하고도 강렬하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앞선 작품들 가운데서도 특히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의 성취가 몇 년 후 새로운 지점에 다다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순』의 주인공은 휴학생 신분으로 회사를 다니고 있는 스물다섯 살의 직장인 여성 안진진이다. 소설의 주요한 줄거리는 안진진이 김장우와 나영규라는 두 남자 사이에서 결혼을 할지 말지, 한다면 누구와 할지 고민하는 삼각관계의 연애 서사로 이루어져 있다. 김장우와 나영규는 결혼 제도 내에서 남성에게 흔히 요구되는 상반된 가치를 각각 대변하는 것처럼 해석될 수 있다. 김장우는 서울 외곽을 돌아다니면서 자유롭게 작업을 하는 프리랜서 사진작가로서 소위 낭만적인 사랑이라는 가치를, 나영규는 부유하고 안정적인 부르주아 직장인으로서 현실적인 생활이라는 가치를 각각 표상한다고 말이다. “나영규에게 없는 것, 그것이 확실히 김장우에게는 있었다”는 사실을 안진진은 알고 있다. 반대로 김장우에게는 없는 것이 확실히 나영규에게는 있다는 사실도. 이것은 두 남자 모두 사랑과 결혼에 관한 안진진의 욕망을 완벽하게 충족해주지 못하며, 각각 특정한 가치로 반분되어 있는 교환 대상으로 나타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러한 구도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결혼을 교환 가치로서 인식하는 동시에 낭만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젊은 여성의 모순된 심리를 드러내는 장치라고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이 단순히 삼각관계의 불안정한 역학을 그려낸 서사, 혹은 소위 속물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여성의 내면적인 갈등을 나타낸 서사라고 일축할 수 없게 만드는 요소가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안진진의 가족 이야기다. 안진진은 시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는 어머니, 그리고 그 어머니의 일란성 쌍둥이인 이모를 가까이서 바라보며 결혼 제도에 진입하는 여성이 처한 조건에 대해 성찰한다. 가난하고 무능력한 아버지와 결혼한 이후 경제적으로 빠듯하게 살아가는 어머니와 달리 이모는 부유한 이모부와 결혼한 이후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어머니와 이모의 대조되는 삶은 각각 김장우와 나영규라는 데이트 상대에게 투사된다. 안진진은 한편으로는 무료하고 텅 빈 것처럼 보이는 이모부와 나영규의 삶을 무시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정하고 무능한 아버지와 김장우의 삶과 거리 두고 싶어하는 심리도 보인다. 이 소설에서 아버지/김장우-이모부/나영규의 대조적인 구도는 뚜렷한데, 흥미롭게도 결혼에 대한 안진진의 고민이 깊어질수록 그녀의 생각이 궁극적으로 닿는 지점은 병들고 무력한 패배자 남성으로서의 아버지에 대한 성찰이다.

 

“아버지를 말하는 일은 나에겐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다. 어머니는 물론이고 아버지를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단칼에 아버지를 해석해버리는 것이 나에겐 늘 의문이었다. 아버지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마 아버지 스스로도 사람들이 자신을 그런 식으로 쉽게 판단하고 생각을 그쳐 버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을 것이다. … 내가 알고 있는 한 아버지는 타인에 의해 한 번도 정확히 읽혀지지 않은 텍스트였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모독이었고 또한 아버지의 불행이었다.”

 

경제적으로 무능할 뿐만 아니라 가족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끝내 가족을 떠나버린 아버지를 안진진은 아직 읽히지 않은 하나의 ‘텍스트’로서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이러한 시도는 단지 결혼을 앞둔 자신의 조건을 역사화해보려는 노력이라기보다, 차라리 자신의 남은 인생을 섞어야 하는 제도적인 파트너로서 남성이라는 집단의 특성을 해석하려는 노력에 가까워 보인다. 남성 집단에 대한 환상과 연민을 걷어낸 안진진의 이 냉철한 눈길을 텍스트를 바라보는 비평가로서의 시선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까. 비평이 텍스트를 둘러싼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한 답을 추구하는 행위라면, 이모의 자살을 겪은 이후 나영규와 결혼하는 결말로서 안진진이 던지고 있는 질문의 묵직함은 지금 한국 사회에도 여전하다.

 



 

인아영
문학평론가, 1990년생
평론집 『진창과 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