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에세이 - 길을 묻다
효율성(efficiency) 뒤에 가려졌던 충분성(sufficiency)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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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년 여름호 (통권 92호)
효율성(efficiency) 뒤에 가려졌던 충분성(sufficiency)의 가치

더 나은 삶의 질을 약속해준 ‘효율성’

경제 이야기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고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개념 중 하나가 ‘효율성’이다. 주어진 자원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사용할지 따지거나 비용 대비 효율성이 얼마나 높일지를 고려할 때도 효율성은 언제나 현대 경제문제를 다룰 때 가장 중요한 고려사항이다. 일찍이 경제학자 라이오넬 로빈슨(Lionel Robbins)은 경제학을 ‘희소성’을 다루는 학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효율성은 바로 희소성을 다룰 가장 적절한 해법이다. 희소한 자원을 가지고 낭비 없이 최대의 생산을 할 수 있도록 자원을 이용하려면 ‘기술적 효율성’을 최대로 끌어올려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기술적인 효율이 뛰어나게 상품을 만들어도 아무도 사용하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 그래서 소비자들의 수요에 최대한 맞춰서 생산하도록 자원을 배분하는 ‘배분적 효율성’도 중요하다. 이번에는 스마트폰을 몇 대, 자동차를 몇 대 생산할 것이지, 그리고 이를 위해 희소한 원료와 자원을 어떻게 가장 효율적으로 배분할 것인지 결정하자는 것이다. 경제학자들에 따르면 어떤 경제가 가장 효율적인 상태에 이르면, 다른 이의 손해를 감수하지 않는 한 더는 각자의 이익을 개선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고 이를 경제학자 파레토(Vilfredo Pareto)의 이름을 따서 파레토 효율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어느덧 경제의 최고 목표는 파레토 효율을 달성하는 것이 되었다.

이제 좋은 경제란 희소한 자원을 최대한 낭비 없이 사용하는 경제, 같은 자원으로 더 많고 질 높은 생산을 보장하는 혁신적 기술이 뒷받침하는 경제, 그리고 소비자들이 원하는 상품을 최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가장 효율성이 높은 경제라고 인식되었다. 그러다 보니 일반 시민들도 경제적 이슈를 대면하면, 자연스럽게 어떤 선택이 더 ‘효율적인가’하는 방식으로 질문을 던진다. 이렇게 효율성은 경제의 최고 가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느덧 사회와 일상생활에서도 효율성 잣대를 가지고 판단하고 선택한다.

 

효율성 뒤에 외면받은 공정성과 형평성

효율성은 특히 시장경제에서 잘 작동한다고 알려졌다. 경제학자들은 ‘시장의 가격신호’야말로 경제를 효율적으로 만들어주는 가장 탁월한 메커니즘이라고 말한다. 사실 시장은 거래되는 모든 상품이나 서비스를 ‘가격’이라는 단일한 양적인 숫자로 비교하도록 만들어주는 매우 특이한 공간이다. 개인별로 천차만별인 취향이나 선호, 각기 다양한 제품의 질이나 고유한 특징들이 모두 가격에 반영되고 나면, 시장의 수요자나 공급자들은 다종 다양한 수천 종류의 상품을 오직 가격으로만 비교하여 살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한다. 그래서 경제학자들은 시장에서 판매되고 소비되는 수억 개의 상품들이 시장의 가격신호 덕분에 가장 효율적으로 생산되고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시장경제와 효율성은 짝이 되어 함께 다닌다.

하지만 시장 메커니즘이 늘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것만은 아니다. 시장은 생계를 위해 빵이 꼭 필요하지만 지불능력이 없는 가난한 서민들의 필요를 채워줄 생각은 없다. 안전한 주거공간을 원하지만 역시 비용 마련이 시민들의 내 집 마련 요구도 시장은 외면한다. 독점 현상이나 환경오염처럼 경제학자들이 ‘시장실패’라고 하는 현상도 시장이 효율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대표적인 사례다.

사실 사회가 ‘효율성’이라는 잣대만 가지고 작동되는 것은 아니다. 효율성 못지않게 사회에는 형평성과 공정성, 또는 평등의 가치도 필요하다. 예를 들어 소득 분배의 문제를 따져보자. 사람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경제 활동에 참여하여 어떤 이들은 ‘임금’으로, 일부는 ‘배당’이나 ‘투자수익’으로 생산된 부를 가져간다. 경제학은 시장이 분배한 소득이 각자가 생산에 기여한 몫을 가장 효율적으로 정한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최근 점점 더 심각해지는 소득 격차와 불평등 상황을 지켜보면, 시장에서 효율적으로 분배되었다고 하는 소득이 정말 공정한가에 대한 의문이 커질 수밖에 없다.형평성과 공정성의 가치가 훼손된다고 시민들이 믿기 시작하면 사회의 통합성에 금이 가고 사회가 분열과 갈등에 빠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효율성 추구를 가능하게 해주었던 시장도 불안해지고 제대도 작동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건강한 사회는 효율성과 함께 형평성도 함께 추구되어야 한다. 형평성에 대한 요구가 과도해서 효율성을 해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효율성에 집착하여 형평성이 외면되는 사회도 안정화될 수 없다.

 

효율성으로 해결할 수 없는 기후위기

효율성과 형평성 말고도 최근 환경과 생태위기가 두드러지면서 생태적 ‘지속가능성’의 가치를 중시하는 흐름이 점점 더 강력해지고 있다. 문제는 효율성과 지속가능성이 어떤 지점에서 서로 충돌한다는 것이다. 효율성은 희소한 자원으로 최대한 많이 생산하고 최대한 수요자의 선호를 만족시키도록 생산하는 것만 강조할 뿐 ‘얼마나 많이’ 생산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하지 않는다. 사실은 ‘가능한 한 더 많이’ 생산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경제 성장이론에 ‘성장의 한계’라는 것은 없는 이유다. 그래서 생태경제학자 허먼 데일리(Herman Daly)는 미시경제에서는 한계효용체감과 한계비용체증에 따른 최적의 영역이 있는데 거시경제에서는 왜 더 이상의 성장이 ‘멈춰서야 할 최적의 규모’가 없느냐고 의문을 던졌다. 왜 성장의 디폴트값은 ‘영원한 성장’이냐는 것이다.

그런데 유한한 지구 위에서 우리 경제가 무한히 경제 규모를 팽창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최근 심화되는 기후위기로 인해 깨닫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기술혁신에 의지해서 끝없이 효율성을 개선함으로써 무한히 성장할 수 있다는 암묵적 가정이 도전을 받게 된 것이다. 사실 이미 1960년대에 경제학자 케네스 볼딩(Kenneth Boulding)은 “유한한 지구 위에서 지수적인 경제성장이 무한히 계속되리라고 믿는 사람은 미친 자이거나 경제학자뿐일 것”이라며 무한성장의 불가능성을 경고했다. 그리고 1972년에는 로마클럽은 그 유명한 『성장의 한계』라는 책을 통해 무한성장이 환경적 지속가능성과 정면으로 충돌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선구적인 경고들은 최근까지 대체로 무시되다가, 기후변화가 눈에 띌 만큼 가시권에 들어오고 세계적으로 기후재난의 충격이 점점 더 심각해지면서 새삼스럽게 주목받게 되었다.

물론 일부에서 효율성이 ‘기후위기’ 해결에도 강력한 해법으로서 유효하다고 주장한다. 단열이 좋은 주택을 지어 에너지 효율이 높아지면 더 적은 화석연료를 태워 건물의 난방을 할 수 있고, 효율이 높은 자동차나 가전제품을 생산하면 이 제품들을 더 많이 사용하더라도 에너지 사용량은 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단열로 주택의 에너지 효율을 높이든, 각종 가전제품의 효율을 높이든, 기술혁신으로 동일한 소비에 대해 더 적은 온실가스만 배출하고, 더 적은 에너지를 쓰며, 더 적게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효율성 개선으로 기후대처를 하자는 주장은 지금도 강력한 호소력을 갖고 있다.

그런데 효율성을 높여 지속가능성의 위험에 대처하자는 전략에는 결정적인 맹점이 있다. 19세기 영국 경제학자 윌리엄 제본스(William Jevons)가 제기했던 ‘반등 효과’다. 당시에 영국의 석탄 매장량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고갈 우려가 커졌는데, 일부에서는 석탄을 더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혁신기술을 도입하면 소비량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제본스는 여기에 반론을 제기했다. 그는 석탄 효율을 향상시킨 기술혁신이 사회적 기대와 달리 오히려 더 많은 석탄 소비로 귀결되리라 예측했다. 왜냐하면 기술혁신에 의한 효율성 향상으로 석탄 단위 사용당 비용이 하락할 것이고 비용 하락은 수요 증가를 촉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는 우리도 이미 일상에서 경험하고 있다. 예를 들어 기술혁신으로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컴퓨터 기능이 향상되면, 소비자들은 기능이 더 많고 더 복잡한 제품을 새롭게 구매하려고 하지, 과거 기능 수준에 머무른 제품을 싼 가격으로 구매하지 않는다.

 

‘충분성’과 균형, 그리고 건강한 삶

끝없는 효율성 추구로 기후위기와 같은 지속가능성 이슈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기후위기라는 새로운 도전과제에 직면하자 최근 효율성을 대신할 새로운 가치로 ‘충분성’의 가치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충분성이란 지구생태계가 허용할 수 있는 한계 범위 안에서 모든 시민들의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초점을 두고, 그 이상의 물질적 팽창에 몰두하지 말자는 것이다. 지구생태계의 한계 범위를 중시하는 생태경제학자들이나 ‘탈성장(degrowth)’를 주장하는 이들이 특히 충분성의 가치를 강력히 지지한다. 예를 들어 생태경제학 창시자의 한 사람인 허먼 데일리는, 사치스러운 삶이 아니라 좋은 삶을 위한 충분한 정도만큼 부를 유지하면서, 오랫동안 삶을 유지하고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경제의 궁극적인 목적을 바꾸자고 제안했다.

탈성장을 지지하는 이들이 제안하는 ‘자발적 단순성(voluntary simplicity)’, ‘적을수록 풍요로움(less is more)’, ‘검소한 풍요로움(frugal abundance)’, ‘느린 경제(slow economy)’ 등의 슬로건들도 모두 철학적으로 충분성의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 이들은 “효율성 우선 원칙은 충분성에 초점을 두는 것으로 대체하고, 기술 자체를 위한 기술이 아니라, 우리가 활기차고 검소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새로운 사회적, 기술적 조치에 혁신의 초점” 맞추자고 제안한다. 또한 “생산과 소비가 더 낮은 수준에서 지속 가능하고, 인간의 협동과 생태계를 위해 더 많은 여지를 남겨두도록 경제 규모를 줄이는 그런 전환”을 하자고 주장한다. 이들이 즐겨 사용하는 은유인 “코끼리를 날씬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코끼리를 달팽이로 바꾸자”는 것도 충분성의 가치를 강조한 은유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기후변화 시대에 충분성의 가치를 지지하는 흐름들이 과거 종교 진영 등에서 주로 강조된 ‘절제’나 ‘청빈’의 삶 등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충분성의 가치는 현대문명이 이뤄놓은 물질적 삶의 수준을 인정하고 현대 복지국가의 성취를 이어가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기술혁신과 효율성 향상에 기댄 영원한 물질적 부의 확대가, 유한한 지구 위에서는 허용될 수 없다는 점 역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래서 나온 해법이 바로 ‘사적 충분성(private sufficiency)’과 ‘공적 풍요로움(public abundance)’이라는 캐치프레이즈다. 각 개인들은 과도한 소비에 집착하지 말고 기본적 필요를 채우면 충분하다는 관점으로 개인 삶의 태도를 바꾸자는 것이 사적 충분성의 원칙이다. 그리고 개인들이 물질적 재화를 배타적으로 과도하게 소유하는 대신에, 가능한 한 공유자원을 함께 이용해서 개인 필요의 부족을 보완하는 사회 시스템을 만들자는 것이 공적 풍요로움이다. 이렇게 하면 현대문명이 이룬 물질적 복지 수준을 유지하면서도 지구생태계의 한계 범위에서 지속 가능한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충분성의 원리는 ‘균형의 원리’와 연결된다. 이는 생명활동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체들은 성숙한 단계가 될 때까지는 신체적으로 성장을 거듭하지만, 일단 충분히 성장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더 많은 소비와 더 많은 성장이 아니라 건강한 균형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전환한다. 생태경제학자 팀 잭슨(Tim Jackson)에 따르면, 성숙해진 생명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몸의 에너지 균형이다. 인간은 매일 체중을 건강히 유지하기 위해 특정 양의 칼로리가 필요하고 “좋은 신체 건강이란 칼로리 측면에서만 보자면 칼로리 과잉과 칼로리 부족 사이에서 이뤄지는 균형 상태”다. 그에 따르면 생명체는 “오직 부족함이 있을 경우에만 많을수록 더 좋아질 수 있다. 이미 과도함이 나타나는 경우에는 많을수록 오히려 더 나빠질 뿐”이라면서, 그는 과도한 확대와 무한팽창이 아니라 균형이 생명체들이 추구해야 할 최선이라고 강조한다. 효율성 경제보다 균형이 있는 충분성 경제는 이런 토대 위에서 주목을 받게 된다.

 

충분성은 한계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탈리아 영화감독 주세페 토르나토레(Giuseppe Tornatore)의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The Legend of 1900)>의 마지막 장면은 이렇게 시작한다. 일생을 배 안에서만 피아노를 치며 살아온 주인공은 드디어 배가 뉴욕에 정박하자 사랑하는 이를 따라 평생 처음으로 배에서 내리려고 트랩의 계단을 내려간다. 그러다 계단 중간에 멈춰 서서 눈앞에 끝없이 펼쳐진 육지의 도시를 잠시 바라보더니 다시 발길을 돌려 배 위로 올라가 버린다. 도대체 왜 그토록 바라던 육지에 내려 새로운 미래의 삶을 살아가지 않고 평생 벗어나지 못한 좁은 배 안으로 되돌아오는 결정을 했을까? 주인공은 이렇게 이유를 설명한다.

“피아노 건반은 시작과 끝이 있어. 피아노에는 88개의 건반이 있어. 모두에게 똑같이. 건반은 유한하지만 우리는 무한해. 이 건반들을 가지고 우리가 만드는 음악은 무한해. 난 이게 좋아. 내 인생은 이걸로 충분해. 그러나 날 트랩 위에 세우고 내 눈앞에 수백만 개의 건반을 펼쳐 놓는다면, 끝도 없는 수백만, 수십억의 건반 말이야. 건반이 무한하다면 그 건반으로 내가 연주할 수 있는 음악은 없어. 그건 내가 앉을 자리가 아니야. 그건 신이 연주하는 피아노야.”

탈성장 경제학자 요르고스 칼리스(Giorgos Kallis)는 자신의 짧은 책 『한계들(Limits)』에서 이 영화를 소개하면서 ‘유한한 한계’를 새롭게 해석한다. 그는 지구 생태계가 우리에게 강제로 ‘한계’를 지우는 것처럼 받아들이지만 사실 그런 것은 없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불편하게 생각해온 언어인 ‘한계’를 긍정의 언어로 재해석한다. “한계는 목적을 전제로 한다. 중력 그 자체는 한계가 아니라 그냥 팩트다. 하지만 우리가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목적을 세우면, 자살할 생각이 아닌 이상 그때부터 중력은 뛰어내릴 수 있는 높이에 한계를 지운다. 바닷물은 물고기에게는 생명을 주지만 인간에게는 죽음이라는 한계를 지운다. 한계는 주체와 주체의 의도에 있는 것이지, 우리 의도와 무관하게 자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충분성의 가치는 사실 일정한 ‘한계’를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정한 한계 안에 머무르자는 주장은 자칫 절제의 강요나 억제를 요구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칼리스는 이런 측면을 다시 생각해보자고 권고한다. 다시 말해서 한계를 지우는 것은 우리 자신의 결정이지 자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한성장을 향해 질주하는 현대문명이 기후 위기에 직면할까 걱정하여 한계를 정하는 결정을 내린 당사자는 우리 자신이다. 자연과 인간의 경제를 공존시키고, 모두 삶을 지속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균형이나 한계와 어울린 ‘충분성’은 기후위기 시대에 우리가 추구해야 할 새로운 가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렇다고 ‘효율성’을 폐기할 필요는 없겠지만 말이다.

김병권
기후경제학자. (사)녹색전환연구소 연구위원, 1964년생
저서 『기후를 위한 경제학』 『진보의 상상력』 『기후위기와 불평등에 맞선 그린뉴딜』 『사회적 상속: 세습사회를 뛰어넘는 더 공정한 계획』 『사회혁신』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