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내가 살던 곳엔 개울이 가깝게 있어 물 흐르는 소리를 항상 들을 수 있었다. 물소리는 자신의 소리 외에 많은 소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소리가 새소리였다. 물소리를 자세히 듣기 위해 귀를 대는 것은 아니었지만 물 흐르는 개울가에서 놀다 보면 나도 모르게 물소리에 집중을 했었다. 그것은 개울 주변 숲에서 울던 새소리와 물소리가 어우러지면서 발생하게 되는 우연의 현상 같기도 했다. 개울 주변에서 울던 새가 날아가고 소리가 멈추어도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물소리에서 새소리를 듣기 때문이었다. 거기엔 새소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론 친구들이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도 있고, 어머니가 동생을 부르는 소리도 있었고, 노스님이 은사 스님과 속삭이는 소리도 있었다. 그런데도 나의 귀는 새소리에만 집중을 했다. 아마도 세속을 떠난 이후 나의 이야기를 가장 많이 들어주고 내게 많은 말을 걸어준 친구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속에 새가 산다고 생각한 것도 그 무렵이었는데 물소리에서 새소리를 들은 이후라서 내겐 자연스러웠던 것 같다. 계곡에 흐르는 물을 따라 개울로 이어지는 물속에서 새를 보고 싶었지만 새는 볼 수 없었고 오로지 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새는 소리만 있고 보이지 않아 신비했는데 어린 시절의 내게는 매우 진중한 현실이었다. 꽤 많은 시간이 흐르고 어지간히 성장할 때까지도 나는 물속에 사는 새를 보고 싶어 많은 계곡과 개울을 찾아다녔었다. 그 후 물속에 새가 산다는 생각이 언제부터 흐려졌는지 모르겠지만 현재의 내겐 오래전 몽당연필로 적어놓은 크지만, 작은 낙서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근래에 선시(禪詩)의 흐름을 연구하던 중 만공1)의 선시 한 편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
老僧踏海水不着 : 노승답해수부착
沙彌擔竹十方春 : 사미담죽시방춘
‘노승은 바다 밟아 물이 묻지 않았고, 사미는 대를 매어 시방이 봄이로다’라는 선시이다. 이 선시의 일구(一句)를 접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바다를 밟아도 물이 묻지 않는 경계라니! 나는 물소리에서 새소리를 듣고 심지어는 새소리 외에 다른 많은 소리도 들었다. 뿐만 아니라 물속에 새가 산다고 생각했던 나였다. 한동안은 잊은 듯했지만, 여전히 물소리에 새소리가 있다는 생각이 최근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바다를 밟아도 물이 묻지 않는다니! 아, 그랬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계절에 자유로운 구름처럼 삶이란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것인데 스스로의 생각에 빠져 편견을 만들고 집착과 고집을 지어내어 괴로움의 덩어리를 키워서 마치 그런 혼돈이 인생의 멋인 것처럼 여기며 거기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했던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물을 밟았는데 왜 묻지 않았겠는가! 그것은 물이 묻는 것에 집착하지 않음으로 하여 물과 하나의 경지를 이루니 물과 발이 하나여서 밟은 것도 없고 묻은 것도 없는 탈집착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최근에 개울을 다시 찾았었다. 여전히 물이 흘렀지만, 새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것이 탈집착의 시작이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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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공은 덕숭산 수덕사 구한말의 스님으로서 전라북도 태인 분이고 13살 때 서산 천장사에서 태허 화상에게 중이 되고 활구를 참해서 도를 얻고 경허의 법을 이었다. 근대 한국 불교의 선풍을 일으켜 불교를 크게 홍포한 선지식이다. (『현대한국선시(-現代韓國禪詩)』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