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 : 나의 아버지·나의 어머
「젊은 느티나무」의 작가와 부정확한 독자인 아들

- 나의 어머니 강신재

  •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 : 나의 아버지·나의 어머
  • 2024년 여름호 (통권 92호)
「젊은 느티나무」의 작가와 부정확한 독자인 아들

- 나의 어머니 강신재

강신재(1924~2001) : 소설가, 서울 출생. 한국여류문학인회 회장, 대한민국예술원 정회원, 소설가협회 대표위원 역임, 장편소설 『임진강의 민들레』 『파도』 『오늘과 내일』, 소설집 『젊은 느티나무』 『여정』, 수필집 『모래성』 등

 

이 코너의 통상적인 제목은 ‘나의 아버지’인데 내 경우에는 어머니에 대한 것이다. 남들처럼 아버지에 관하여 쓰라고 한다면 이야기할 것도 많고 쓰기도 편할 것 같긴 하다. 어머니의 문학이나 문인으로서의 사회적 활약에 관해서는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신 분들도 많을 것이고 데이터도 많이 만들어져 있고 하니 나는 소설가 강신재가 문학 밖에서 어떠한 사람이었을까? 어떤 엄마이고 어떤 주부였을까? 등에 관하여 아들의 입장에서 한번 기억을 되살려 보고자 한다.

어머니께서는 서울 태생이지만 (100년이 지났다는 사실을 이 글을 쓰면서 처음 인식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외할아버지·외할머니께서는 이북이 고향이시다. 세브란스 의사이셨던 외할아버지께서 아주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일남삼녀의 맏딸로 어릴 때부터 세 동생을 돌봐야 하는, 반쯤은 가장 역할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던 모양이다. 바탕에 깔려 살짝만 보이는 어머니의 강인한 면모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어머니는 신체적으로 약한 편에 속하셨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주 강한 분이었고, 섬세함과 예민함이 강조되어 있지만 예술가라고 하기에는 매우 이지적이며 용의주도하고 현실감이 뛰어난 분이셨다. 내가 어머니에게서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DNA와 직접 교육받거나 또는 생활을 통해서 얻게 된 후천적인 체질들은, 지각을 잘하는 점과 약한 치아 등을 제외하면, 매우 훌륭하고 감사해야 할 부분들이 많다. 머리숱이 많은 것이나 감각적이고 예민한 것 등은 대부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 같고, 잠을 잘 못 잔다거나 야행성인 점도 상속받은 것이 틀림없다.

 

어머니(왼쪽)와 필자

가족사진, 맨 왼쪽이 어머니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고 국어 교과서에도 실린 「젊은 느티나무」의 작가 강신재의 아들인 나는 유명 소설가의 자식으로서 약간의 유명세도 치러야 했다. 책 좀 읽는다는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 거의 모두는 내가 당연히 문학에 정통할 것이고 글도 어지간히 쓸 것이라고 일말의 의심도 없이 믿고 있다. 나로서는 딱하기 이를 데 없다. 특히 중·고등학교 국어 선생님들은 최악이었다. 이 선생님들은 나의 계보에 관하여 훤할 뿐만 아니라 관심도도 높으시다. 가끔 치르는 백일장 같은 행사가 있는 날이면 나의 곤혹스러움은 최고조에 달했다.

나도 어머니의 많은 작품을 읽어 보았지만, 그 느낌이나 평가와는 관계없이 나는 실제로 어머니 문학의 ‘정확한’ 독자가 될 수 없다고 항상 주장해 왔다. 그 이유는 나는 일반적인 독자들에 비하여 작가와 너무 근접(낳고 키워진 관계이니만큼 근접이라는 표현조차 무색하다)해 있기 때문이다. 글을 읽다 보면 어떤 부분의 배경, 담긴 느낌, 특이한 표현 등이 나의 경험치 속에도 작지만 일부 똑같이 존재할 때가 많기 때문에 스토리에 몰입하기보다는 자꾸 생각이 다른 트랙을 따라가고 있는 경우들을 종종 보게 된다. 어떤 경우에는 어머니께서 작품에 필요한 정보를 나에게 직접 얻기도 하시는데, 예를 들어 이러이러한 상황인데 여기에 걸맞은 스포츠카라면 어떤 모델이 좋겠나?… 그래서 드디어 그 차가 소설 속에 등장했을 때, 어머니께서 그 모델을 어떤 차로 파악하셨을까를 궁금해하고 있는 나로서는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자세가 잘 안 나온다. 또 종종 일어나는 일이지만 새 작품의 주인공 이름을 정하는 일 등은 우리 가족의 즐거운 부담이기도 했었다. 설명해 드린 바와 같이 이 같은 상태에서는 훌륭한 독자가 될 수 없었다는 핑계를 조금은 이해해 줄 수 있으리라고 본다.

 

제38회 삼일문화상 시상식, 맨 앞줄 왼쪽이 필자와 어머니

여성 문인들과 함께한 어머니, 맨 앞줄 왼쪽에서 첫 번째

 

어머니와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많지 않았지만 언젠가 주부백일장 등의 심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중 지극히 평범하지만 나에게 확 와 닿았던 말씀이 하나 있었는데 “모든 스토리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 있어야 한다”라는 것이었고 많은 글에서 이 점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 작품활동의 근간이 되는 생각인 것 같아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이 글을 쓰게 되면서 어머니에 관하여 돌이켜 보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긴 세월 동안 우리 모자 사이에 흥미 있을 만한 충격적인 일이나 강도 높은 무슨 일이 있었다는 기억을 찾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하면 매우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여 왔다는 것인데 그저 당연한 것으로만 생각했다가 이번 기회에 곰곰이 되짚어 보니 그게 그렇게 쉽고 흔한 일만은 아니었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어머니는 나를 무척 사랑해 주셨지만, 마냥 단순히 응석만을 받아 줄 대상이 아님을 느끼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나 자신도 비교적 말 잘 듣고 뭐든 잘 해내는 편이기는 했겠으나 무엇보다도 어머니께서는 매사에 합리적이셨고 나를 인정해 주시고 스스로 자부심을 갖도록 하는 기본적 스탠스를 항시 유지하고 계셨다는 점이 원만함의 비결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가정교육을 비롯한 모든 교육에 상당한 의무감과 열정을 가지고 계셨던 것 같고(그 시절의 부모님들은 대체로 다 그러셨던 것 같기는 하지만) 식탁예절 등 단순한 내용일지라도 아주 단호한 어조로 말씀하셔서 다시 반복해야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어머니의 교육방침은 통상적이고 관습적인 것이기보다 아이의 관심, 능력 등에 따라 능동적으로 융통성 있게 과감히 대처하는 것이었다. 내가 다니고 있던 유치원에 얼마 지나 흥미를 보이지 않자 어머니는 여러 가지 분석 후에 더이상 보내지 않기로 결심하시기도 하였다.

내 평생에 어머니께서 정말 정색을 하고 나에게 주의를 주셨던 경우가 두어 번 생각난다.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를 통틀어 매라는 걸 맞아본 적이 딱 한 번 있다. 그것도 어머니에게. 내가 국민학교(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어머니는 나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셨던 모양이다. 참고로 우리 집에 피아노가 있었고 누님은 나중에 피아니스트가 되셨다. 아무튼 나를 피아노에 앉혀놓고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흥미도 목적의식도 제대로 없었던 나는 도무지 하려고 들지 않았고 어머니는 고민 끝에 매를 들어서라도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 당시 집마다 있던 짚을 엮어서 만든 빗자루를 거꾸로 들고 몇 차례 때리셨다. 그것도 완고한 나에게 그다지 효과가 없자 본인이 저렇게 싫어하는 걸 억지로 할 필요가 없겠다고 판단하셨는지 피아노 레슨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그 후 내가 대학생이 되어 취미로 음악 활동도 하고 하면서 어머니께서 그때 좀 더 두들겨서 억지로라도 피아노를 가르쳐 주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때늦은 후회를 여러 번 했다.

 

어린 시절엔 그저 당연한 것으로만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어머니는 그야말로 원더우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시절 쉽지 않았을 커리어우먼, 해방둥이인 누나와 사변둥이인 나 두 아이의 엄마, 그리고 결코 만만치 않았을 우리 아버지의 내조자 역할 등을 동시에 훌륭하게 해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매일 많은 양의 글 쓰시고 각종 심사, 수상, 출판기념회 등의 행사, 여류문인회장 등 문학 관련 사회활동은 말할 것도 없고, 식구들을 잘 먹이셨다(어머니는 음식 솜씨도 상당해서 우리에겐 큰 행복이었는데 사실 우리 외할머니 솜씨에 비하면 많이 달린다고 봐야 솔직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 매 단계 입학시험을 봐야 했던 두 아이의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유학까지 보살피시고, 정치도 하셨던 아버님의 빈번한 손님 치루는 일 등 하나도 만만한 것이 없었다.

지금도 수시로 생각나는 것은 어머니께서 신문연재를 쓰실 때의 긴박감이다. 신문연재는 신문 하단에 삽화와 함께 실리는 연재물인데 신문이 매일 발간되는 만큼 그날그날 일정량의 원고가 만들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장기간 동안. 다른 작가들은 잘 모르겠으나 창작이라는 것이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우리 어머니 경우도 원고가 미리 쓰여 있는 경우는 많지 않았던 것 같고 마감 시간에 겨우 원고가 넘겨지는 때가 자주 있었던 것 같았다. 이야기를 만들어 원고 분량을 시간 맞춰 채우는 일도 큰일이었겠지만 또 한 가지 문제는 여기에 같이 실려야 하는 삽화다. 스토리가 나와야 읽고 거기에 맞는 그림을 그릴 수 있겠는데 마감 시간이 다 되도록 원고가 마련되지 못할 때가 있었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 이럴 때는 삽화 선생님과 급한 전화 통화로 내용을 말로 전달하여 원고와 삽화가 동시에 신문사로 전해지는 일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어머니에 관한 이 짧은 글을 부탁 받고 마감 기일에 쪼들려 한없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면서 장편 여러 편이 다 써지도록 매일매일 시간에 쫓기면서 창작활동을 이어가신 어머니의 인내와 능력에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또 말년에 『명성황후』 등 역사소설을 쓰시면서 이를 위해서 엄청난 양의 공부를 하시는 것도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추억을 몇 가지 더 떠올려 보면 어린 시절 몇 번인가 비가 좀 오는 분위기 있는 날이면 어머니는 날 데리고 동작동 국립묘지에 가곤 했다. 당시에는 그 장소가 개방되어 있었고 지금처럼 도시 한복판에 있는 느낌도 아니었다. 미니멀한 ‘독특한 질서’가 가미되어 있는 자연적인 환경 속에 한적함과 엄숙함 등이 빠듯하게 깔린 그곳에서 그저 그 장소의 분위기를 느끼며 그 동네를 좀 거닐다 돌아오는 것이었는데 어린 나이에도 엄마가 왜 거기에 날 데려왔는지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아 신기하다.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그 집(우리 가족) 정서가 그런 것이군요”라고 말해서 그 표현에 내가 상당히 수긍했던 적이 있다. 레인코트를 입은 그때 어머니 모습이 예쁘다고 느꼈던 기억이 난다.

나의 공군 장교 훈련 시절, 면회가 허용되는 마지막 두 달 동안 단 한 주도 빼놓지 않고 주말마다 음식을 장만하셔서 멀리 대전까지 면회를 와 주셨던 건 어머니의 큰 사랑을 느끼게 하는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 큰 아들에게 뭐 그렇게까지 하셨을까 의문이 들 정도다. 그리고 어머니는 항상 나를 장남(누나가 있는 외아들이지만)으로 취급하고 대해 주셨다. 그런데 돌아가시기 얼마 전 입원해 계실 때 말씀 중에 무심코 “우리 막내가 걱정되어서 그러지”라고 말씀하시는 걸 듣고 막내라는 낯선 단어에 내가 좀 놀랐던 기억이 난다. 아마 어머니 마음속 한쪽에는 나는 모르고 지냈던 막내에 대한 걱정과 사랑이 항상 있으셨나 보다.

 

끝으로 어머니의 의외지만 재미있기도 한 모습에 관하여 알고 계신 분이 별로 안 계시리라고 생각되어 여기 몇 가지 소개해 보고자 한다. 야단맞을 일인가 몰라 걱정스럽긴 하지만… 어머님은 의외로 싸움 구경을 아주 좋아하셨다. 옛날에는 동네나 우리 주변에서 심심찮게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요즘처럼 잔인하게 치고받는 싸움 말고 언성을 높이는 단계를 제법 넘어선 싸움이 대부분인데 이런 싸움에 어머니는 상당한 관심을 보이셨다. 싸움소리가 들리면 열 일 제쳐 놓고 달려 나가신다. 세상에 싸움처럼 리얼한 것이 없다고 하시면서 관전에 열의를 보이셨다. 이유는 그런대로 납득이 가지만 남이 보면 다소 과도해 보일 정도의 흥미였던 것만은 틀림이 없다. 반면에 운동경기에 관해서는 우리 편이 지고 있거나 승부가 아슬아슬한 경기는 전혀 관심이 없으시고 누가 봐도 승리할 것이 뻔한 시합만 즐기셨다. 이 또한 일반 사람들의 습성이라고 보이진 않는다. 그런가 하면 이건 아주 애매한 평가를 받을 부분인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성향이 강해서 그렇다고 할지, 사람은 남자고 여자고 예뻐야 한다는 주장(?)이시다. 편파적이고 불공평하고를 불문하고 안 예쁜 사람은 일단 호감을 받기가 매우 어렵다. 마릴린 먼로가 예쁜 여자 쪽에 속한다는 데 크게 이의가 없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못생겼다는 생각이 들면 아들이라도 내다 버리셨을지도 모른다는 우려스러움이 있다.

나중에 어머니께서는 예술원 회원이 되셨다. 멋모르는 아들로서는 오래 그 분야에 계셨으니 늘 그랬듯이 하실 때쯤 되셨나 보다 하고 말았는데,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도 한참 후에 어머니 비석에 새길 내용을 정리할 때 겨우 알았으니 한심한 아들이라 아니할 수 없다. 후에 나의 은사이신 서울대학교 이광노 교수께서도 건축가로서 예술원 회원이 되셨는데 예술원 회원을 어머니와 지도교수로 가진 복도 많은 필자로서는 분에 넘치는 두 분의 큰 은혜에 도저히 보답할 길이 없어 애석할 따름이다.

서기영
강신재 소설가의 장남,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1950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