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강 너머의 저택들은 우람한 나무들 사이로 지붕이 높이 솟아 있다. 일본 부자들이 모여사는 마을이라고 들었다. 매해 5월이면 일본인들이 축제를 벌여 경찰들마저 맥주를 뿌려대며 논다는 알트슈타트가 종우는 처음이었다. 주방장으로 일하는 대국식당이 있는 비스마르크 거리에서 S반 버스로 10분 거리였다.
강변에 레스토랑과 카페에서 내놓은 파라솔이 즐비하다. 맥주잔이 빽빽한 쟁반을 양손에 들고다니는 흰색 유니폼의 웨이터들과 부딪치면서도 종우의 상념은 끊이지 않았다. 이 길 어디쯤 선화가 있었을까? (『여름 손님』 P.117 )
연작소설집 『여름 손님』에 수록된 「별빛보다 멀고 아름다운」 속 독일 뒤셀도르프는 일본인 다음으로 한국인과 중국인이 많이 산다. 2010년 봄, 45일간의 여행에서 나는 조선족들이 모여 사는 건물 5층에서 한 달간 머물렀다. 작품 속에서처럼 조선족들은 밤마다 술을 마시고 카드게임을 했다. 아무개가 도박으로 얼마를 잃었고, 아무개가 몇 부 이자로 돈을 꿔주는지를 들으며 나는 그들의 안주를 축냈다.
탈북자로 가장해 난민 자격 심사를 통과했다는 이야기를 은밀히 들려준 이는(작품 속 종우는 실제 인물) 거리로 창이 나 있는 복도 끝방에 살았다.
철로변의 반딧불이 일제히 날아올라 하얀 달과 희롱을 일삼는다는 이얼스의 밤하늘을 보며 선화는 선택의 기로에 빠졌다고 했다. 선화가 달빛을 받으며 산속을 오래오래 걸어 간 곳이 어디인지, 왜 수풀에 몸을 가리고 야밤을 기다렸는지 말하지 않았지만 종우는 알 수 있었다. 철가시망의 국경선을 넘고 사막을 건너 선화가 가고자 했던 곳이 어디인지. (『여름 손님』 P.114)
창가에 앉아 선화가 온밥을 먹으며 종우에게 들려준 내몽골 국경마을은 ‘이얼스’이다.
수년 전 조선족 가이드(장편 『낙타의 뿔』을 위해 가리봉동에서 섭외했다)와 함께 갔던 그곳이 뜻밖에도 탈북자들이 몽골 사막으로 넘어가는 루트 근처였다. 때문에 경찰서에 불려가 여권 검사를 받아야 했다. 온천으로 유명해 긴 여행의 피로를 풀기 위한 방문이라는 해명을 마치고 나와서 본 국경마을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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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들이 야밤을 틈타 넘는다는 산속 계곡에 맑은 물이 흐르고 수초들이 하늘거렸다. “탈북자가 저기서 숱하게 잡혀갔다. 저 길이 좁잖은가? 손바닥들을 철사로 굴비 엮듯이 꿰어 잡아가는 기라. 그럼 북송당하는 기라……” 지느러미까지 선명한 물고기들을 보고 있는 내 옆에서 조선족 가이드가 무심히 말했다.
달이 풍덩 빠진 호수는 푸른 잉크 빛이었다. 선화가 내몽골 산속에서 보았다는 달도 저런 빛이었을까? 깊은 숲속 계곡물 같던 선화의 몸속에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수풀 속에서 야밤이 되기를 기다리는데 뭉게구름 조각들이 풍선처럼 둥둥 떠내려왔다고 했다. 얼라들 옷 빨아 널면 파삭 마르겠더라고요……. 산에서 열매 따고 냇가에서 고기 건져 아들딸 많이 낳고 살고 싶다는 말은 선화가 했는지, 자신이 했는지 종우는 기억나지 않았다. 몸과 몸이 섞여 흘러가는 길고 깊은 세계는 말이 하나 되고 노래가 하나 되고 꿈이 하나 되는 유장하고 찬란한 영토였다. (『여름 손님』 P.127)
양을 치는 늙은 한족의 딸을 낳으며 선화가 6년을 불법체류자로 머문 내몽골 국경 마을 이얼스의 계곡물은 지금도 흘러흘러 철조망에 걸리지 않고 몽골에 닿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