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밭단상
우리는 얼음의 자식들

  • 글밭단상
  • 2024년 여름호 (통권 92호)
우리는 얼음의 자식들

“아빠, 옛날에는 왜 겨울에 감을 지붕 위에 올려놨어?” 퇴근하고 들어선 나에게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은 다짜고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 아빠 어렸을 때 일기장에 그렇게 쓰여 있길래.” 녀석은 어디서 찾았는지 40여 년 전 내 초등학교 일기장을 펼쳐놓고 있었다. “그때는 눈이 진짜 많이 왔나 봐. 맨날 눈 이야기밖에 없어.” 학원 문제집을 펼쳐 놓은 채 아들 녀석은 킬킬거리며 열심히 아빠의 일기장을 넘겼다.

아버지는 벼베기가 끝나고 서리가 내리기 전에 감 수확을 했다. 곶감을 깎아서 처마 밑에 걸고 남은 건 소쿠리에 담아 지붕으로 올렸다. 커다란 대나무 소쿠리에 대봉감을 차곡차곡 쌓은 다음 볏짚으로 갓을 만들어 얹혔던 우리 집 ‘감단지’. 떫은 감이 서리 맞고 눈 맞아 홍시가 되어 가는 동안 나는 지붕 위에서 눈길을 뗄 수 없었다. 추운 겨울밤, 천연 냉장고에서 갓 꺼내 온 홍시, 살얼음이 껴 너무 무르지도 않고 살짝 쫄깃하면서도 시원한, 그 달콤함이란… 장독대 눈이 녹고 지붕 위 ‘감단지’가 비어 갈 때쯤, 봄바람이 불었다.

아들 녀석이 자리를 뜬 뒤 오래된 일기장을 훓어보았다. 겨울철은 온통 눈 얘기였다. 올해는 왜 이렇게 첫눈이 안 오냐며 툴툴대고, 마당 눈 쓸기 싫다고 도망갔다 아버지한테 혼나고, 뒷집 승준이와 눈싸움하다 싸우고, 대나무 스키를 만든다고 아궁이 불에 소매를 태워 먹고… 겨울에 눈만 오면 온 천지가 놀이터였다. 눈사람 만들고 부수기, 썰매 타고 경주하기, 고드름 따서 칼싸움하다 우둑우둑 씹어먹기…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겨울이 따뜻해지고 들판에 눈이 쌓이지 않고 도랑이 안 얼고 마을정자에서 눈싸움하는 아이들 목소리가 사그라졌다.

 

지난해 12월, 허리춤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었다. 노르웨이 북극 스타인달스브린 빙하를 며칠 동안 오갔다. 빙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위해서다. 20kg 배낭을 메고 스노우슈즈 설피를 신었다. 눈 쌓인 숲길을 뒤뚱뒤뚱 걷다가 넘어지고 뒹굴고 그러다 눈으로 세수하고… 춥고 배고팠지만 즐거웠다. 마치 40여 년 전 초등학교 아이로 돌아간 기분이랄까. 유년 시절 이래로 이만큼 온몸으로 눈을 접해본 적이 있었던가 나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사그락사그락, 뽀드득뽀드득… 몸은 이 소리와 감촉을 그리워하고 있었나 보다.

노르웨이 과학저술가 비에른 바스네스는 자신의 책 『빙하의 반격』에서 사미족은 눈에 관해 100개 이상의 단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사미족은 북유럽의 원주민으로서 바스네스는 유년 시절 대부분을 노르웨이 최북단 핀마르크 고원에서 그들과 함께 보냈다. 책에 소개된 연구기록에 따르면 사미어는 눈과 얼음을 어간으로 하는 단어가 180개 정도이고 접사 활용이나 어간 변용을 고려하면 단어 수는 대략 1천 개 정도가 된다고 한다.

예를 들어 크기가 크고 부드러운 함박눈은 치흣세벨라가(tsihtsebelaga), 가늘고 약간 얼음에 가까운 눈은 스카르따(skártta), 젖은 눈으로 내리자마자 바로 얼어버리는 눈은 턀싸(Tjalssa), 굵은 소금처럼 거친 얼음 모양의 눈은 쇠나쉬(sänásj)라 부른다. 또한 사미족은 한겨울 가장 건조하고 가벼운 눈, 하블렉(habllek)이 내리면 여우 사냥을 떠나고, 두껍게 쌓인 눈이 부드럽고 뭉쳐지지 않는 오보다흐카(åbådahka) 때는 늑대 사냥을 나간다고 한다. 이동이 어려워 늑대가 체력적으로 쉽게 지치기 때문이다.

눈과 얼음은 지구의 수많은 생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45억 년 지구의 역사 동안 빙하기와 간빙기를 반복하면서 원핵생물과 진핵생물을 거쳐 척추동물과 파충류, 포유류에 이르기까지 생명 진화의 중요한 촉매제 역할을 해왔다. 250만 년 전 대빙하 시대가 없었다면 현생 인류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바스네스가 우리 모두를 ‘얼음의 자식들’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빙하는 지구 담수의 70%를 차지하고 있으며 전 세계 20억 인구가 빙하나 눈이 녹은 물에 식수를 의존하고 있다.

 

지난해 여름 끝, 생애 처음으로 빙하를 밟았다. 흙먼지 사이로 비치는 영롱한 파란 빛. 사파이어 같았다. 아 얼음이 파랗구나. 얇은 얼음은 모든 색깔의 빛이 통과하여 투명하게 보이지만 빙하와 같이 두꺼운 얼음은 파장이 짧은 파란색의 빛을 반사해서 파란색으로 보인다. 시간이 만든 자연의 색. 우리와 동행한 빙하 가이드 프레드릭은 ‘빙하숲’이라 했다. 오래된 얼음이 녹으면서 그 속에 압축된 공기 방울이 터지면서 고운 새소리를 낸다. 하루 동안 녹음된 빙하 동굴의 소리를 들어보면 영락없이 열대우림 속에서 풀벌레가 울고 새들이 지저귄다.

지구상의 얼음이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 북극 그린란드 빙하는 시간당 3천만 톤씩 녹고 있고 남극 해빙 면적은 3년 연속 사상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사막의 나라 아랍에미리트에선 하루 만에 1년 치 폭우가 쏟아지고, 인도의 한 여성 앵커는 40도가 넘는 폭염에 생방송 도중 졸도하기도 했다. 해마다 최고, 최악의 기록을 경신하며 되돌릴 수 없는 임계점, 티핑포인트에 다가가고 있다. 지구상의 얼음이 다 사라진다면 인류는 어떻게 될까?

더 늦기 전에 올 겨울에는 아들과 어디 산골 마을 얼음 썰매라도 타러 가야겠다. 먼 옛날, 시인 백석이 그리던 ‘약눈’이 내리기를 기대하며…

 

… 엄매와 나는 앙궁 우에 떡돌 우에 곱새담 우에 함지에 버치며 대냥푼을 놓고 치성이나 드리듯이 정한 마음으로 냅일눈 약눈을 받는다

이 눈세기물을 냅일물이라고 제주병에 진상항아리에 채워두고는 해를 묵여가며 고뿔이 와도 배앓이를 해도 갑피기를 앓어도 먹을 물이다

- 백석의 시 「고야(古夜)」 중에서

박정훈
KBS PD, 1975년생
다큐멘터리 <다큐인사이트> <대기획 빙하 3부작>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