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발굴기
주인의 이름이 새겨진 백자들

- 조선시대 일상이 엿보이는 귀중한 자료

  • 문화유산발굴기
  • 2024년 여름호 (통권 92호)
주인의 이름이 새겨진 백자들

- 조선시대 일상이 엿보이는 귀중한 자료

사진 1. 서울 종로 청진 12~16지구 유적의 빼곡한 조선 전기 집터 모습(사진 제공 (재)한울문화재연구원) 

 

지금이야 그릇을 빌려 쓰는 일이 낯선 풍경이지만, 삼사십 년 전만 해도 이웃에 그릇을 빌리는 일이 낯설지 않았다. 필자도 명절이나 잔치 때면 간혹 어머니의 급한 부름으로 주변에서 그릇을 빌려 왔던 유년 시절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가끔은 오신 손님에 비해 우리 집의 그릇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잔치가 끝나면 집별로 그 집의 아이 이름이나 집의 호수(號數)가 적힌 메모랑 따로 챙겨둔 잔치 음식이 담긴 그릇을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 주는 것도 필자의 일이었다.

 

요새는 각자 필요한 만큼의 그릇을 가지고 있고, 또 안되면 일회용 그릇이라도 사다 쓰다 보니 손님을 초대하더라도 그릇이 부족할 일은 거의 없다. 더군다나 외식이 주류를 이루다 보니 집에 그릇이 부족할 일은 더더욱 적은 것이 현실이다.

 

조선 시대는 달랐다. 손님 접대가 많고, 크고 작은 잔치와 회합이 이어지던 조선 사회에서 주변에 음식을 나누고 또 받아먹던 일은 일상이었고, 그때마다 많은 그릇이 여기저기를 오갔을 것이다. 손님이 몰려들면 그릇이나 밥상도 더 필요했을 것이고 지체 높은 대갓집이 아니고서야 갖가지 그릇을 충분하게 갖춰둔 집들이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특히 (사진 1)에 보이는 것처럼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 없이 집들이 들어선 한양에 살던 서민들은 그릇 같은 세간살이를 쌓아둘 공간을 충분히 확보하기도 어려웠다. 그 때문에 조선 시대 도성(都城)의 양반과 서민 중 다수는 필요에 따라 운종가의 세기전(貰器廛)에서 그릇과 소반을 돈 주고 빌리거나, 이웃에게 도움을 청했을 것이다. 게다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밀집해 살던 조선 시대 한양은 인구밀도가 높았고 주택의 한쪽을 대여해 주는 등 타인과 공간을 공유해야만 하는 상황도 잦았던 모양이다. 다시 말해 평소에도 그릇 같은 집기가 다른 사람의 물건과 뒤섞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러한 당시 환경이 특정 집안이나 개인의 이름이 표시된 백자들을 만들어 냈다. 이러한 백자는 대부분 일상에서 두루 쓰는 발과 접시 그리고 병 등의 식기에 해당한다.

 

사진 2. <백자병>, 조선 시대, 현재 높이 16㎝, 서울 장충동 2가 202번지 유적 출토, 한성백제박물관 소장(사진 제공 (재)한울문화재연구원)
사진 3. <‘朴宅’이라고 쓴 백자발>, 조선 시대, 현재 높이 2.6㎝, 서울 종로 청진 12~16지구 유적 출토, 한성백제박물관 소장(필자 촬영)

 

서울 장충동의 어느 유적에서는 굽 둘레에 ‘김사복댁’이라는 한글을 비롯하여, 같은 내용의 한자인 ‘金司僕宅’을 표시한 <백자병>이 출토된 바 있다(사진 2). 16세기 무렵에 만든 <백자병>에 사복이라는 벼슬에 오른 김씨 집안의 그릇임을 한글과 한자로 표시해 두었다. 그릇에 이름을 새긴 것은 집안의 식솔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사진 2)의 <백자병>은 출토될 당시에도 새하얀 빛깔이 유독 돋보였던 유물이다. 이렇게 질 좋고 단정한 모양의 백자는 경기도 광주에 자리했던 왕실의 백자 공장인 분원(分院)에서 만들었고, 주로 궁궐이나 관청을 필두로 일부 관료 사대부 가문에까지 제공했던 그릇이다. 이런 백자는 이웃에 빌려주었더라도 꼭 다시 찾아와야 했고, 그러려고 이름도 새겨 두었을 것이다. 김사복 집안은 최대한 많은 사람이 알아볼 수 있게끔 그릇에 한자와 한글로 이름을 써두었던 모양이다.

 

서울 종로 청진동에서는 ‘朴宅’이란 글자를 먹으로 쓴 백자도 출토되었다(사진 3). 백자의 글씨는 박씨 집안의 권속들이 주변 다른 집의 그릇과 자신들의 그릇이 뒤섞이는 것을 막으려고 써넣었을 것이다. 이 사발이 그 집안에만 있었다면 구태여 그릇에 글씨를 써둘 필요는 없었을 것이지만, 박씨 집안 역시 주변 이웃에 그릇을 빌려주거나, 음식을 나눠 먹는 과정에 그릇이 서로 오갔으니 이렇게 그릇에 표시를 했던 것이다.

 

유약이 발리지 않은 백자의 굽 안쪽에 먹으로 쓴 글씨는 생각보다 잘 지워지지 않는다. 굽 안쪽에 유약을 바르지 않은 백자들은 주로 조선 전기에 유행했다.

 

조선 전기를 지나며 백자는 점차 일상에 긴요한 그릇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왕실과 관청을 넘어 민간에서도 백자를 사용할 수 있게 되자, 그릇의 품질에도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릇 전체에 유약을 발라 한 점씩 따로 구워낸 질 좋은 백자와 더불어 여러 점의 백자를 포개어 제작한 질 낮은 백자들도 많이 만들어졌다. (사진 4)의 백자들은 여러 점의 그릇을 포개어 굽던 과정에 한쪽으로 기울어져 가마터에 버려진 유물이다.

 

사진 4. <백자편>, 명지대학교 박물관 소장(필자 촬영)

이런 그릇은 가마에서 구워지며 위아래 그릇의 유약이 녹아 서로 엉겨 붙지 않도록 굽과 그 주변에 아예 유약을 바르지 않았다. 조선 사람들은 바로 이 꺼끌꺼끌한 부분에 필요한 내용을 먹으로 표시했다.

 

굽의 안쪽까지 그릇 전체에 유약을 발라 구워낸 질 좋은 백자에는 먹으로 이름을 써둔다 해도 금방 지워지므로 ‘김사복댁’의 백자처럼 그릇의 단단한 표면에 필요한 내용을 새기는 방식을 택했다. 그에 비해 포개구이로 제작한 일반 백자에는 먹으로 이름 등을 표시할 수 있으니 무척 간편했을 것이다. 실제 먹으로 필요한 내용을 표시한 백자는 조선 시대 유적에서 여러 점이 출토되고 있다.

 

  사진 5. <‘삼워리’라고 쓴 백자접시>,
  조선 시대, 현재 높이 2.6㎝, 서울 종로
  세종로 구역 2지구 유적 출토,
  서울역사박물관 소장(필자 촬영)
  사진 6. <‘슌더기’라고 쓴 백자발>, 조선 시대,
  현재 높이 3.7㎝, 서울 종로 청진 12~16지구
  유적 출토, 한성백제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재)한울문화재연구원)
  사진 7. <‘막더기’라고 쓴 백자저부>, 조선 시대,
  굽지름 6.4㎝, 서울 종로 공평 1ㆍ2ㆍ4
  지구 유적 출토, 공평도시유적전시관 소장
  (사진 제공 (재)한울문화재연구원)

 

사진 8. <‘강아지’라고 쓴 백자저부>, 조선 시대, 현재 높이 4㎝, 서울 종로 어영청지 유적 출토, 한울문화재연구원(사진 제공 (재)한울문화재연구원)

백자에 먹으로 표시된 글자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사람의 이름이다. 가장(家長)의 성씨나 관직을 표시해 두기도 했지만, 이름만 따로 적어둔 경우도 많다. 백자에 표시된 이름은 ‘삼워리(=삼월이)’, ‘슌더기(=순덕이)’, ‘막더기(=막덕이)’, ‘강아지’, ‘乭伊(=돌이 혹은 똘이)’처럼 대체로 성(姓)이 없고, 다수가 한글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백자에 쓰인 이름 중에 한글이 많다는 것은 이름을 써서 각자의 그릇을 챙기려던 자들에게 한자보다는 한글이 편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이름들은 1446년 반포된 한글이 이후 실제 민간의 일상에서 적극 활용된 증거이기도 하다.

 

사진 9. <‘乭伊’라고 쓴 백자접시>, 조선 시대, 현재 높이 4㎝, 서울 종로 세종로 구역 2지구 유적 출토, 서울역사박물관(사진 제공 (재)한울문화재연구원)

이름의 주인공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댁(宅)으로 지칭되는 사대부와 달리 그다지 높은 신분에 속한 인물은 아닐 듯하다. 이들 이름의 주인공은 그릇의 소유자였을 수도 있으나, 관리자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 시대 경상도에 살던 양반 곽주(郭澍, 1569~1617)가 떨어져 지내던 아내에게 잔치에 쓸 물건을 요청하는 편지에도 물건 옮기는 노비의 이름을 보내는 물건에 표시해 두라는 대목이 나온다.

 

…(전략) 병풍 두 개를 보내고 두 개는 (그냥) 두라고 했지만, 그 둘을 마저 보내되 아이로 하여금 ‘도나루 것’이라고 병풍 뒤에 써서 보내라고 말하소. 소반은 발 달린 것으로 여섯 개만 보내되 그것도 반(盤) 밑에 ‘ᄆᆡ종이’라 하여 써서 보내고(후략)…1)

 

곽주는 집안 잔치를 위해 여러 물건을 이곳저곳에서 빌려 왔는데, 그때 물건 주인을 구분할 수 있도록 자기 아내의 집에서 온 것들에는 동네 이름이나 물건을 가져온 노비(매종)의 이름을 써두도록 했다. 조선 시대에는 물건 주인의 성명을 직접 드러내기보다 주인의 벼슬이나 사는 동네를 비롯하여 물건을 실제 관리하는 하인의 이름을 표식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백자를 사용하면서 다른 사람과 소유관계에 대한 시비가 없었다면 이름을 표시해 둔 그릇도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백자들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이 복잡하게 모여 살았던 과거의 일상을 짐작할 수 있다.

 

문화유산을 발굴하다 보면 아주 간혹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위대한 유적을 찾아내기도 한다. 때로는 역사책에 기록된 이름난 인물과 관련한 흔적을 만날 수도 있다. 그러나 유적에서 발굴한 유물은 대부분 이름 모를 선조들의 흔적이다. 사실 우리 역사의 대부분은 필자처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든 결과이다. 바로 그런 조선 시대 평범한 인물들의 일상을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는 유물이 특정 집안이나 개인의 이름을 표시한 백자들이다. 백자에 쓰인 내용은 그 어떤 역사책에서도 보기 힘든, 평범해서 더욱 귀중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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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편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책에 소개되어 있다. 백두현, 『현풍곽씨언간 주해』, 역락, 2019, 245~248쪽.

 

박정민
박정민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부교수, 1977년생
저서 『동아시아의 도자문화 백자』(공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