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 : 나의 아버지·나의 어머
“시인은 모국어를 영생시키고 존재를 노래로 지켜야”

- 나의 아버지 신동집

  •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 : 나의 아버지·나의 어머
  • 2024년 여름호 (통권 92호)
“시인은 모국어를 영생시키고 존재를 노래로 지켜야”

- 나의 아버지 신동집

신동집(1924~2003) : 시인, 대구 출생. 영남대학교 교수, 계명대학교 교수, 한국현대시인협회 명예회장, 예술원 회원 역임. 시집 『대낮』 『서정의 유형』 『제2의 서시』 『모순의 물』 등

 

나는 아버지 25세 때에 태어났고, 내 아래로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다. 나는 장녀라서 아버지에게 귀여움을 많이 받으며 자랐고, 또 자신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해 주시던 아버지가 기억이 나 새삼 그리워진다.

아버지께서는 대구에서 태어나서, 학창시절 등 10여 년을 대구를 떠나 있었던 때를 빼고는 돌아가실 때까지 평생을 대구에서 사셨다. 언젠가 ‘중국 고사에 고향에서 오래 살면 대접을 못 받는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미련하게 고향을 지키는 사람도 더러는 있어야 하지 않느냐? 싫다고 다 떠난다면 고향은 황폐해지지 않겠느냐?’고 하시면서, 서울의 몇몇 대학에서 오라고 해도, 뒷덜미를 끌어당기는 무슨 힘이 있었는지 평생을 대구에서 사셨다.

아버지가 기억하시기로는 아마 추석 한가위 때인 듯하다면서, 그때 우리 할머니와 고모와 함께 아래채 청마루에서 커다란 보름달을 보고 계셨는데, 고모는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에서 만나는 이야기를 하고 계셨고, 할아버지께서는 달을 보시면서 퉁소를 오랫동안 불었던 기억이 짙은 그리움과 함께 늘 선하다고 하셨다.

 

가족사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아버지

 

충남 마곡사에서 (왼쪽부터) 조병화 시인, 김윤성 시인, 정한모 시인, 김춘수 시인, 아버 지 신동집 시인, 백철 문학평론가

 이렇게 할아버지부터 음악과 예술에 대한 사랑이 있었던 것이 아버지에게도 물림이 되어, 아버지는 문학을 하면서도 음악과 그림을 좋아하셨고, 또한 나 역시 평생을 피아노와 함께하며 피아노과 교수로 정년퇴임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일제 강점기 시절 동경에서 학생으로 있을 때 베토벤의 <월광곡>과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SP판을 학생 신분으로는 큰돈을 주고 샀으며, 예술가인 자형을 둔 아버지의 누님 댁에서 슈만의 <시인의 사랑>,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등을 들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구스타브 말러의 <대지의 노래> 등을 많이 좋아하셨다. 또 미켈란젤로·렘브란트·고야·피카소 등의 그림을 좋아하였으며, 고흐와 루오는 더욱 선호하셨다. 특히 한국 전쟁 중에, 대구 미국 문화원에서 전시회를 가진 이중섭 화백을 구상 시인과 같이 후원하고, 그가 그린 은박지 그림을 애지중지 간직하고 보셨다.

일제 최후의 시기에 아버지는 징병으로 평양까지 끌려갔다가, 5개월 만에 8.15 광복을 맞아 귀향하였다.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광복 2년 전부터라고 하셨으며, 김동인·정지용·김기림·서정주·헤르만 헤세·토마스 만·한스 카로사 등의 작품을 샅샅이 읽었다고 한다.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대학 예과 2학년을 수료하던 1948년 여름에, 시집을 내려고 한다면서 증조할아버지께 말씀드리니 선뜻 5만 원이라는 그 당시로서는 큰돈을 주셔서 첫 시집 『대낮』을 500부 한정판으로 출판하셨다. 그러나 예술이란 그런 게 아닌데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시중에 나도는 시집을 회수하여 파기했다고 한다.

아버지께서는 서울대학교 예과 수료 후 별생각 없이 정치학과로 진학을 결정하여서,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졸업생이 되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인천상륙작전이 있고, 중공군이 다시 내려올 때 아버지는 군에 입대해서, 4년 7개월간을 육군 사관학교, 고급 부관학교 등에서 통역장교로 근무하셨다.

아버지가 처음으로 내었던 시집 『대낮』을 파기하고 난 후, 단단한 작심으로 각오한 끝에 1954년 겨울 『서정의 유형』이라는 시집을 내셨다. 이 시집으로 소설가 염상섭·황순원·안수길, 시인 김동명 씨와 함께 약관 30세의 나이로 1955년 아시아자유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이로써 아버지의 위치가 부동으로 확립되었고, 군 복무 중에도 국방장관 표창장을 받았다. 시상식은 1955년 3월 반도호텔에서 있었고, 모윤숙 여사께서 아버지께 직접 카네이션 꽃을 꽂아 주셨으며, 이를 계기로 아버지께서는 시인의 자리로 우뚝 올라섰다고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미당 서정주 시인에 대해서 가끔 말씀하셨다. 서정주 시인의 「귀촉도」는 아버지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이렇게 절묘하게 말을 다룰 수 있는가 생각했다고 하셨다.

육군 제대 후 아버지께서는 대구 청구대학을 거쳐 계명대학교에서 계속하여 봉직하셨다. 1959년 여름, 미국 국무성 초청 교수로, 미국의 인디애나대학 대학원에서 공부하기 위해 도미하였다. 인디애나대학의 큰 규모에 놀라고 미국의 풍부한 자원을 부러워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작가나 시인에게도 애독자가 많으면 고무가 되고 격려가 된다고 하셨다. 시집 『서정의 유형』이 나왔을 때 불티나게 잘 팔렸다고 하셨다. 초고본마저 다 떨어져서 보관본을 구해야 할 때 부산일보 사장이던 김상훈 시조 시인의 것을 받아보니 10회 독파 완료라고 쓰여 있어 매우 고마웠으며, 부산의 어떤 여자분이 교사였던 30대의 자신의 오빠가 폐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날 때 늘 간직하고 읽던 『서정의 유형』을 관 속에 함께 넣었다는 사실을 알려 왔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어릴 때 단독 주택인 우리 집 마당에 우연히 자라난 수수 한 그루를 아끼며 매일 보시고, 하늘이 맑은 날 보이는 흰 구름과 먼 산의 푸르름을 사랑하며 늘 바라보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기억난다.

1984년 대한항공 KAL기 격추 사건이 일어났다. 그때 TV를 보고 있던 아버지가 흥분과 분노 때문에 갑자기 쓰러지셨다. 그래서 급히 대학 병원 응급실로 가서 의사인 사위와 사위의 동료들이 치료했으나 약간의 언어 장애와 운동 장애가 왔다. 퇴원 후 집에 와서도 꾸준히 치료와 운동에 힘을 쓰면서 시를 쓰고, 다른 글쓰기도 하셨다. 또 아버지의 시를 노랫말 삼아 여러 작곡가가 가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1961년 경북 문화상을, 1981년에는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1982년에는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수상하셨고, 1983년에는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대한민국 옥관문화훈장, 세계시인상, 도천 문학상, 제37회 대한민국 예술원상, 제2회 순수문학상을 수상하셨다. 2003년 8월 20일 영면하셔서 경북 성주군 우성 공원묘지에 모셨다.

아버지, 늘 그립습니다!

신희원
신동집 시인의 장녀, 계명대학교 피아노과 명예교수, 1948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