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학의 순간들
한국 장편 서사 활성에 기여한 ‘세계문학상’

  • 우리 문학의 순간들
  • 2024년 여름호 (통권 92호)
한국 장편 서사 활성에 기여한 ‘세계문학상’

‘우리 문학의 순간들’ 원고 청탁을 받고 무엇을 기록에 남겨야 할까 뒤돌아보다 고사했다. 세월이 더 필요할 듯 싶었다. 한 계절이 흐른 후 청탁이 다시 이어져 하릴없이 문학담당 기자 30여 년 동안 미약하나마 한국문학 한 줄기에 영향을 미쳤을 만한 일에 구체적으로 관여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되짚어 보았다. 장편을 공모하면서 1억 원이라는 큰 고료를 내건 문학상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그 고료와 시스템을 유지하면서 장편 서사의 활성화를 이끌어 낸 상으로 ‘세계문학상’을 꼽는 것은 그리 큰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 배경이다.

1993년 처음 1억 원 고료를 내걸고 국민일보가 장편을 공모했고 김형경의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가 당선작으로 선정돼 화제가 됐지만, 아쉽게도 이 상은 2회까지 이어진 후 자취를 감추었다. 갈수록 활자 매체인 문학은 영상과 디지털에 밀려나는 추세가 가속되면서 재능 있는 이들이 문학보다는 영상 쪽으로 대거 빠져나가는 흐름이었고, 문단에서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여기에다 한국에는 유독 장편 문학이 빈약하다는 자책이 커지는 상황이었다.

첫 창작집 『베니스로 가는 마지막 열차』의 해설로 인연을 맺은 이래 거의 ‘어부’에 가까운 낚시 마니아인 문학평론가 하응백의 ‘어로작업’에 편승하게 되면서 그와 자주 어울렸는데, 어느 날 재능 있는 문학청년들이 영상 쪽으로 대거 빠져나가는 세태를 한탄하다가 1억 원 고료 문학상을 제정하는 아이디어가 화제로 부상했다.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당시 세계일보 문화부 데스크를 맡고 있던 권오문 선배에게 문학상 신설을 제안했다. 기실 아이디어 차원이었고, 큰 고료를 신문사가 감당하기 쉽지 않을 터여서 그냥 던져나 보자는 생각이었다.

이후 오랫동안 애면글면하던 장편 집필의 꿈을 이루기 위해 2004년 휴직 신청을 한 후 그해 겨울 ‘토지문화관’에 입주했다. 박범신·김민기·차현숙을 포함한 4명이 그해 겨울을 보냈다. 박경리 선생님이 우렁각시처럼 작가들 방해 안 되게 새벽이나 밤늦게 몰래 공동 주방에 나물 같은 것들을 놓고 가시곤 했다. 그곳 비탈진 언덕에 자리 잡은 ‘하얀 방’ 생활이 끝나갈 무렵, 권오문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빨리 복귀해서 구체적으로 문학상을 진행하라는 것이었다. 그 사이 선배는 사장에게 1억 원 고료 문학상을 제안했고, 신문사가 고료와 진행비를 포함한 일체 경비를 전적으로 부담하겠다는 승인을 받았다고 했다. 2005년 1억 원 고료 세계문학상 신설의 배경을 알리는 기사를 이렇게 작성했다.

 

‘문학의 위상은 20세기 말에 이르러 위협받기 시작하다가 급기야는 ‘문학의 죽음’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운위될 만큼 대중들로부터 소외당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영화를 비롯한 영상매체의 부상, 인터넷이 광범위하게 활용되기 시작하면서 게임을 비롯한 디지털시대의 다양한 오락 수단의 등장 등으로 인해 활자에 의존하고 깊은 사색을 요구하는 문학은 설 자리를 점차 잃어 가는 양상이다. 문학 지망생들은 영상매체로 진로를 바꾸고, 작품을 써도 침체된 문학 시장에서 보람을 찾기 힘들다는 자탄이 터져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모든 예술의 뿌리인 문학의 효용성조차 죽은 것은 아니다. 문학이 살아야 여타 장르도 지속적으로 힘을 지니고 깊이와 생명력을 확보할 수 있다. 세계일보에서 1억 원이라는 고료를 내걸고 문학상을 신설한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침체된 문단에 자극을 주고, 문학에 대한 애정을 간직한 채 여타 장르에서 ‘외도’를 하고 있는 문학 인재들을 다시 문학의 품으로 끌어들이는 기폭제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 같은 소식을 접한 문단에서도 환영하고 격려하는 흐름이 이어졌다. 문학평론가 김윤식(1936~ 2018)은 “그동안 우리 소설은 너무 엄숙했는데 상상력이 풍부하고, 재미가 있어야 사람들이 소설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서 “문학성에 오락성을 세련되게 가미한, 즐겁고도 유익한 소설이 나와 즐거움에 초점 맞추면 문학상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평론가 정과리는 “한국문학이 단편에서 좋은 성과를 내고 있는 데 비해서 호흡이 긴 작품에는 약하다”면서 “한국문학이 세계문학과 어떤 지점에서 만나고 교류할 수 있는가, 한국인의 삶이 세계인의 삶과 어떻게 교류할 수 있는가 하는 현실적인 문제를 천착해 나가면서 새로운 장편이 열리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고료의 많고 적음을 떠나 당시 국내 문학상은 300여 개가 넘을 정도로 범람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또 하나의 비슷한 문학상을 추가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 때문에 우선 고료를 차별화시켰고, 두 번째는 심사방법의 혁신을 도모했다. 문학상의 이름만 다를 뿐 내용은 차별화되지 않는 작품 심사 방식을 피하고, 응모자는 물론 많은 문학인과 독자들이 충분히 수긍할 만한 방법을 모색했다. 지금은 바뀌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예심은 젊은 문인들이, 본심은 중후한 원로급 문인들이 맡는 게 관행이었다. 그 결과 예심에서 아무리 파격적인 작품을 선정해도 본심에서 걸러지기 쉬운 상황이 지속돼 왔다.

 

 세계문학상으로 각광받은 작가들. (왼쪽부터) 정유정, 백영옥, 박현욱, 김별아 소설가 (세계일보 제공)

 

이 상황을 바꾸기 위해 우선 심사위원을 당시 국내 문학상 심사 사상 가장 많은 9명으로 구성했다. 예심위원들이 초기 단계부터 열심히 작품을 읽고 최종후보작을 압축해놓은 뒤에는 손을 놓고 본심위원들 몇 명의 심사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통상적인 심사 방식을 바꾸어, 예심위원들도 마지막 결정 과정까지 참여하기로 했다. 이 방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한국 문단의 대선배들이 흔쾌히 젊은 후배들과 심사를 함께하는 ‘기득권’ 양보가 필수적인 전제였다. 다행히도 그들은 이 과정을 두말없이 받아들였다. 그 결과 성석제·김형경·하응백·서영채·김미현·김연수에 이르는 6명의 청장년층 심사위원이 구성됐고, 노년층에서는 김윤식 김원일 박범신 등 3명이 참여했다.

어느 한 작품이 과반의 표를 확보하지 못할 경우 상위 두 작품을 놓고 결선투표를 하기로 한 심사위원들의 사전 약속에 따라 2차 투표에 들어갔고, 5:4의 결과로 김별아의 『미실』이 극적인 당선의 영예를 안았다. 색공(色貢)을 통해 당대의 권력자들을 휘어잡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향해 자유롭게 다가갔던 여인의 기록을 힘차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살려낸 작품이었다. ‘자유롭고 발칙한’ 작품이 수상한 데에는 달라진 심사시스템의 영향이 컸음을 짐작할 만하다.

2회 수상작, 아내가 동시에 두 남자와 결혼생활을 유지한다는 박현욱의 『아내가 결혼했다』에 이르면 이러한 짐작은 더 확연해진다. 이후 백영옥의 『스타일』(2008년), 정유정의 『내 심장을 쏴라』(2009년) 등 화제작들이 이어졌다. 세계문학상의 ‘성공’에 자극받아 1억 원 고료 문학상들이 여러 개 생겨났지만 매회 화제작들이 양산되는 건 어려운 일이어서, 결국 몇 회 진행하지 못한 채 폐지됐다. 세계문학상이 뒷심을 발휘해 꾸준히 명분을 유지했지만, 이 상도 지금은 고료를 5천만 원으로 내린 상태다.

높은 고료와 참신한 내용으로 세계문학상 수상작이 베스트셀러 행진을 구가하자 1회 139편으로 시작된 응모작은 훌쩍 200편을 넘겨 한때 300편 가까이 장편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사실 단편과 달리 장편 하나를 완성하는 데에는 시간은 물론 대단한 공력이 필요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렇게 생산된 장편 중 단 1편만 수상의 영예를 안는데, 그렇다고 여타 작품들이 모두 사라지지 않는 건 지당한 일이다. 일련의 작품들이 심사에서 아쉽게 최종 선택을 받지 못했지만 이후 같은 작품이 다른 문학상을 받거나 출판되면서 글로벌 작가로 응모자가 부상된 경우들에서도 보듯, 문학상을 계기로 생산된 장편들이 한국문학의 새로운 자양분으로 쌓여가는 효과를 충분히 발휘했다고 본다.

 

 

 

 

 

조용호
소설가, KPI 문학전문기자, 1961년생
장편소설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소설집 『떠다니네』 『왈릴리 고양이나무』 『베니스로 가는 마지막 열차』, 산문집 『키스는 키스 한숨은 한숨』 『꽃에게 길을 묻다』 『여기가 끝이라면』 『시인에게 길을 묻다』 『노래, 사랑에 빠진 그대에게』 『돈키호테를 위한 변명』 등